무등산 해설

[스크랩] 무등산의 의재 허백련 유적지(무등산 구석구석을 찾아서 3부4편)

산술 2016. 1. 15. 12:36

 

계사년 첫 나들이로 나선 무등산 문빈정사와 증심사에 대한 산책을 마치고 찾아간 곳이 의재 미술관이다.

항상 증심사를 지나 무등산에 오를때마다 증심사 입구 좌측에 있는 의재미술관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궁금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글쓴이 또한 처음 개관했을 무렵에만 다녀왔지, 그 후로는 대개의 사람처럼 지나치기가 일쑤여서 궁금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먼저, 의재 허백련에 대해 수십군데에 기록되어 있는 그의 행적을 하나로 모아보았다.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練)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은 1891년에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1977년 자신이 운영하던 농업고등기술학교가 문을 닫을 때

지병인 심장병으로 87세에 사망하였다.

8세때 진도에 유배중이던   무정 정만조(茂停 鄭萬朝)의 서당에서 글공부를 시작했으며, 추사 김정희의 제자 소치 허련이 만든

진도의 운림산방에서 소치의 아들 미산 허형문하에 들어가 11살때 부터 그림공부를 시작하였다.

의재란 호는 의재가 15세 되던 해 스승인 정만조가 지어줬다고 하며, 의재에게 소치는 20촌 정도 되는 한 집안 방계손으로

할아버지 뻘이라고 한다..

 

1912년 일본쿄토로 법률을 공부하기위해 유학을 떠나 1913년 도쿄로 옮겼고 그곳에서 인촌 김성수, 송진우 등과 친분관계를 맺었으며,

1915년 메이지대학 청강생으로 공부하던 법률공부를 그만두고 일본 남종화이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소실취운小室翠雲)의 문하생이 되어

다시 그림공부를 시작하였으며, 그곳에서 인삼장사를 하여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1918년 귀국하여 서울로 근거지를 옮겼고 인촌 김성수의 도움으로 서울생활을 시작하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산수화가 2등을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그해 동아일보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며 1927년 조선미술전람회 6회까지 계속출품하였다.

1927년 광주에 돌아와 정착하여 1936년 조선미술원을 설립하였고, 1938년 연진회를 발족시켜 독자적인 화필생활과 문하생 지도를 겸하였다.

 

 1946년 무등산의 차밭을 사들여 삼애다원을 설립하여 춘설다를 생산할 정도로 다문화 확산에 기여했으며, 1946년 삼애학원이라는

광주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한 후 이듬해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교장에 앉기도 하였다.

그후 국전 2회부터 13회까지 심사위원을 지냈으며 1958년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선임되었다.

시·서·화를 겸전한 남종화의 대가로 1973년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회고전을 가졌으며, 1975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마지막 개인전을 열었다.

1977년 2월 15일 향년 87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으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수여되었다. 대표작으로 《계산청하(溪山靑夏)》(1924), 《설경(雪景)》(1965), 

《추경산수(秋景山水)》 (1971) 등이 있다. (자료출처 : 네이버백과, 미술대사전, 두산백과,  한국민족대백과, 의재미술관)

 

 

 그런 의재 허백련이 무등산 자락 춘설헌에 기거하면서 수 많은 명작을 만들었는데,

오늘은 그의 무등산 자락에서의 행적을 쫓아보고 그의 유적들을 만나 보기로 한다.

들를 곳은 이 안내도의 1,2,3번이 있는 의재미술관과, 4번 문향정, 5번 춘설헌, 6번 의재묘소, 7번 (구)차공장, 9번 관풍대 등 이다.

8번은 의재미술관앞 다리.

 

 

의재미술관

한국남종화의 대가인 허백련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의재문화재단(이사장 허달재)이 건립하였다.

1999년 12월 말에 착공하여 2001년 11월 7일 개관하였으며 허백련이 서울에서 광주로 돌아와 광복 직후부터 타계할 때까지

작품활동에 매진했던 광주 무등산 자락의 춘설헌 근처에 자리잡은 의재미술관은 약 6,000㎡에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이며,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수장고, 세미나실, 다도실 등을 갖추고 있다.

사군자와 서예 등 허백련의 각 시기별 대표 작품과 미공개작 60여 점을 비롯해 낙관과 화실인 춘설헌 현판, 의재의 사진과 편지 등

각종 유품이 전시되고 있다.(자료출처 : 의재미술관)

 

 

삼애헌은 차문화 교실

 

   

학예연구실

 

 

의재미술관은 풍경 속의 미술관이라는 기본 컨셉으로 무등산 등산로의 지형적 요건을 그대로 살려 친환경화적 공법으로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건축가 조성룡의 설계로 지어진 미술관 건물은 2001년 제10회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그러나 전시관은 2013년 봄까지 휴관이다.

 

 

의재는 무등산 자락 춘설헌에 기거하면서 많은 명작을 완성하였고, 시서화(詩書畵) 동호인의 모임인 ‘연진회(鍊眞會)’를 조직하여

광주가 예향(藝鄕)으로 자리잡도록 기여하였다.

그는 단순히 그림에만 몰두한 화가만은 아니어서, 피폐된 농촌중흥을 위해 농업기술학교를 설립, 지도자를 육성하는데 힘써왔고,

한편으로는 애천(愛天) 애토(愛土) 애인(愛人)라는 삼애사상(三愛思想)을 제창하였다.

또한, 무등산 기슭의 차밭에서 재배한 차를 ‘춘설차(春雪茶)’라 이름짓고 “우리 민족이 차를 마심으로서 정신을 맑게 하고,

맑은 정신으로 판단하여 실천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며 차문화 보급에 앞장섰다.(자료출처 : 의재미술관)


 

 

휴관중인 의재미술관을 나와 이제 그의 묘소를 찾아 나선다.

미술관앞 다리를 하나 건너면 문향정이라는 찻집이 나오는데 그 뒤 오솔길을 따라 166m를 올라가면 의재의 묘가 나온다.

 

 

문향정 안내판

 

 

문향정 (聞香亭)

의재가 운영하던 농업기술고등학교의 실습용 축사로 사용하던 것을 노후건물을 해체하고 같은규모로 개축해 

지금은 춘설차 보급장소로 쓰이고 있다.

 

 

 

의재 묘소로 오라가는 길(포토 : tla777)

 

 

 

누군가 먼저 올라간 사람이 있다.

아이젠도 차지 않았지만 선답자의 발자국을 따라 조심스럽게 올라가 본다.

 

 

증심사 산자락이 춘설차밭이지만 의재의 묘소로 올라가는 길에도 차밭이 있다.

 

 

의재묘소 안내판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은 어제 지나간 발자국은 있지만 오늘 지나간 발자국은 없다.

아마 여기까지 온 선답자는 이곳에서 묘소만 바라보고 간 듯 하다.

 

 

잘 정돈된 의재의 묘

 

 

 

묘앞에도 의재가 사랑했던 춘설다가 심어져 있다.

 

 

묘소의 위치가 참 난해하다.

 

 

이제 의재의 묘를 내려와 그가 20년 세월을 지냈던 춘설헌으로

 

 

춘설헌(春雪軒)

광주시 문화재 제 5호로 일본에서 건축을 전공한 건축가이자 서예가인 남용 김용구의 설계로 1956년 지어졌다.

처음에는 본채만 지어졌으나 제자들이 늘면서 뒷채를 달아냈다.

20년을 춘설헌에서 지낸 의재는 이곳에서 한국남종화를 대표하는 수 많은 걸작들을 그렸으며, 이범재(李範載)와 구철우(具哲祐),

김옥진(金玉振) 등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25시의 저자 게오르규도 이곳을 방문하여 의재와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다음은 춘설차 실습장으로

 

 

춘설차 공장이었던 것이 화재로 소실되자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며 현재는 춘설차 실습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차인들이 차 수확 시기에 맞추어 찻잎을 덖어내고 손으로 비벼내는 과정을 반복하며 녹차를 완성하는

제다(製茶)의 전 과정을 실습하는 곳이다.

 

 

춘설차밭에서 따낸 찻잎을 이곳에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가공하고 계곡물로 돌아가는 물레방아를 돌려 춘설차 공장을 가동했다고 한다.

 

 

 

관풍대(觀風臺)

의재가 지인들과 학생들을 위해 만든 차실(茶室)로 세상을 보는 곳이란 뜻.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차를 시음하면서 저간의 세태를 토론케 하였다 하며, 지금은 다례(茶禮)실습장으로 쓰인다.

 

 

 

  

 

관풍대에서 바라본 증심사로 올라가는 도로

 

 

이곳은 새인봉에서 바라본 춘설차밭으로 증심사 바로 옆 산자락에 있다.

 

 

 

 의재의 월매도(月梅圖)<10곡병曲屛>

의재(毅齋)의 초기 작품인 이 《월매도(月梅圖)》는 차원 높은 흉중의 문기가 시정으로 가득히 채워져 있어, 붓끝의 조화에 이르기까지

실로 작가의 정심각고(精深刻苦)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화매(畵梅)의 기세가 기발하고 품격이 고매함은 한 폭의 그림이기 이전에 작가의 천성의 표현인 것이다.

 「강변일수수수발(江邊一樹垂垂發)」(강가에 매화(梅花)나무 대롱대롱 꽃이 피었네)라는 두보(杜甫)(중국 당(唐)나라때의 시인)의 시를

연상케 해주고 있다. (자료출처 : 네이버 미술검새)

의재의 월매도를 감상하면서 의재 허백련과 의재미술관에 대한 여행을 마친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트위터http://twitter.com/huhasim

   지도:4]

          

출처 : simpro의 반 백년 이야기
글쓴이 : simpr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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