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람들 대다수가 무등산에 오면 금기어처럼 말하지 않고 들르지 않는 곳이 있다.
원효사지구까지 가는 1187번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화암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급커브길에 있는 기와건물이 그곳이다.
그곳에는 무등산 충민사 관리사무소가 있지만 전상의(全尙毅1575~1627)장군의 사당이 또한 같이 있다.
그런데 왜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묘가 있는 충장사는 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어도 전상의 장군의 사당인 충민사는 인적없이 쓸쓸하기만 할까.
화암마을은 4수원지가 있는 청풍쉼터를 지나면 나오는 첫 번째 마을로 닭요리집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글쓴이 또한 이곳에서 직장동료들과 잦은 회식을 했던 기억이 있는 곳으로, 닭가슴살 육회를 즐겨먹었던 기억이 있다.
이젠, 이곳까지 모두 무등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이 마을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모르게 되었다.
증심사처럼 대대적인 정비를 통해 이주를 할 지, 아니면 자연마을이다 보니 그대로 존치할 지,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떠날 지....
10년후 어떻게 달라져 있을지는 이 앞을 수시로 지나다닐 수밖에 없기에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화암마을에는 충민사 말고도 운암서원이라는 사당이 있다. 충민사 못가서 바로 우측 화암마을에 같이 있으며, 무등산 곳곳을 찾아서 5부8편 취가정에서 김덕령장군의 취가시에 화답가로 억울함을 들어준 권필을 추배하고 있으며 조선중기의 학자 해광 송제민(海狂 宋濟民 1549~1602)를 배향한 사당이다.
운암사(雲巖祠)라고도 하며 조선숙종32년(1706)에 지역유림들의 청원으로 광주시 북구 운암동에 건립하였으나 조선고종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사라졌다가 1933년 이곳 현 위치에 건립되었던 송제민의 재실 영모재를 가운데 두고 1998년에 다시 세워졌다.
이곳에는 임진왜란때 의병장이었던 제봉 고경명의 사촌동생이자 선조때의 유생인 창랑(滄浪),고경리(高敬履1559~1609)를 추배하고 있으며, 그외에도 송타, 신필, 신한주 등을 추배하고 있다.
운암서원의 문은 굳게 잠겨있어 안을 살펴볼 수가 없다.
해광 송제민의 영모제는 1933년에 이미 이곳에 지어져 있었으며, 북구 운암동에 있던 운암서원은 철폐되었다가 1988년 영모제를 가운데 두고 무등산 자락 화암마을에 다시 세워졌다.
송제민은 1549년(명종4)에 출생하여 1602년(선조35)에 사망하였다.본관은 신평(新平)이고, 초명은 제민(濟民), 호는 해광(海狂)이다.
현감 송기손이 증손으로 조부는 감찰 송구, 부친은 홍문관정자인 송정황이다.
이지함(李之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글재주가 뛰어났고, 호방한 성격에 구속을 싫어하여 벼슬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룡, 양찬숙 등과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의 막하에서 전라도 의병조사관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김덕령의 의병군에 가담하였다. 그 후 김덕령이 옥사하자 종일토록 통곡하고 <와신기사(臥薪記事)>를 저술하였다.
또 척왜만언소(斥倭萬言疏)를 올려 왜적을 물리칠 여러 방안을 피력하였으나 이것이 감사의 미움을 사게되어 이후 무등산에 은거하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고 한다.1789년(정조13)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광주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운암서원을 나오면 바로 보이는 곳이 충민사이고 안의 기와 건물은 무등산 충민사관리사무소이다.
그 아래 운암서원은 임진년 당시 의병장이었던 해광 송제민의 사당이고, 이곳은 정묘호란당시의 장군이었던 전상의(全尙毅) 장군의 사당이다.
그리고 여기서 원효사지구쪽으로 더 가면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사당이 있으며, 그곳에도 충장사 관리사무소가 있다.
그럼 전상의라는 분이 어떤분이었는지 일단 알아보자(아래참고)
충민사 안내문
충민사 안내도
무등산국립공원 충민사관리사무소
충민사 창절문
전상의 장군은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를 구하려고 분연히 일어선 의병장이 아닌 군인의 신분이었다라는 것이 위 충민사 설명서에서 알 수 있다.
현역군인이 나라를 위해 전투현장에서 전사하였기에, 후손들이 그의 묘도 이곳에 만들고 유품도 모아 자신들의 선조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는 것을 누가 무엇이라고 지적질 하겠는가.
하지만 한 가문의 선조를 모신 사당치고는 그 규모가 압권이며, 시설 또한 호화롭기 그지없기에 초창기 충민사가 세워졌을 때만 해도 광주지역에서는 수 많은 말들이 있었다.
충민사정화기념비
사연인즉, 1985년 이곳에 충민사가 건립될 시기는 제5공화국 시절로 대통령은 전두환이었다.
그는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평화로운 시위를 총칼로 동족상잔에 버금가게 진압하고 수 많은 민주인사들을 탄압하고 감옥으로 보냈으며, 이른바 체육관 선거라고 불리는 통일주최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당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막강한 무소불위의 권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며, 그 권위에 기댄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은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명예회장으로 이른바 소통령으로 불리웠다.
그런 전경환에게 주변인사로 부터 서울 인사동에서 나온 전상의 장군의 유품 등이 전달되었고, 전경환은 그 유품의 주인이 천안(天安)전씨 문중의 것임을 알고 서울민속박물관에 기증하게 된다. 왜냐면 전경환은 같은 전씨이지만 정선(旌善)전씨였던 관계로 시조는 같지만 문중이 달랐기 때문이다.
충민사 정려각
어찌되었든 전상의장군의 유품이 전경환에 의해 서울시립민속박물관에 기증된 이후 그의 묘가 있는 화암마을에 갑작스럽게 사당을 짓게 되면서 부터 문제가 시작되었다. 서울시립민속박물관은 천안전씨 문중이 사당을 짓는다고 하니 그의 유품 중 일부를 다시 문중에 돌려주게 되고, 그 유품을 중심으로 충민사가 1982년 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착공되면서부터 광주사람들에게는 12.12군사반란의 주모자이자 5.18광주학살의 주범으로 6공시절 1심에서 국가반란죄로 사형까지 선고받은 전두환이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자신의 선조를 억지로 들춰내서 격에 맞지도 않은 호화로운 사당을 짓는데 국민의 혈세를 퍼붓는다는 것으로 2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 의해 치러진 학살의 도시에 자신의 조상을 모신다고 하니 가당치도 않을 뿐더러 당연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충민사 정려비각
충민사가 공사중일 때 부터 전두환이 조상의 사당을 무등산 자락에 만든다러라 라는 것을 모르는 광주사람들이 없었으며, 1985년 준공된 이후 충민사에 전경환 공적비가 생기면서 광주사람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결국 공적비가 박살나는 사태가 생기고 만다. 충민사는 전두환정권과 관계 없이 1979년 (사)충민공 전상의장군 유적보존회가 설립되어져 이미 신도비를 세웠으며 차후에 후손들에 의해 사당건립계획이 있었겠지만 전두환정권이 들어서면서 갑작스럽게 국민의 혈세로 사당을 만든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거기에 전경환의 이름까지 들어갔으니 오죽했겠는가.
충민사 유물관
그러나 전상의 장군은 광주읍지의 '충신전'에 이 고장 출신 충신 14분의 충절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김덕령,고경명, 전상의 장군을 광주의 3충신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광주의 구성로(광고앞~월산로터리)는 전상의 장군의 호인 구성(龜城)을 따서 지었다고 할 정도이기에, 후손들이 사당을 지어 그분의 충절을 기리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하필이면 본은 틀려도 같은 전씨에, 전경환의 공덕비가 세워졌으며, 5공실세 장세동이 준공일에 기념사를 하였다 하고, 천안(天安)전씨나 정선(旌善)전씨나 시조가 같은 전두환이 자신의 정권시절 국민의 혈세로 호화로운 사당을 지은 것이 문제가 되었기에 광주사람들의 공분을 산 것이다.
충민사 유물관의 유물은 총26종 51점이 있다.
그런데 진품은 국립민속박물관에 있다하고, 이곳은 모두 모조품이라고 한다?
그럼 전경환이 당시 시립민속박물관에 기증했다가 충민사가 준공되면서 다시 유품의 일부가 이곳에 기증되었다는데,
어느 유품이 이곳에 진열되어 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으며, 위의 안내도 대로라면 모두 다시 국립민속박물관으로 간게 맞을 것이다.
이 사진을 보니 준공한 1985년 (사)충민공 전상의 장군 유적보존회는 장군의 유품 등을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유품들은 모두 모조품인 것이다.
유물관 내부에서 전상의 장군의 유품 모조품을 보고 나오면서 장군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그린것 외에는 달리 아는 방법이 없다.
김덕령장군을 모신 충장사에는 유물관에 장군의 일대기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것과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 시대가 바뀌면서
전상의 장군이 국가에서 30여년이나 혈세를 투입하여 관리할 정도로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위대한 분은 아니었다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우리 주변 사람들의 조상들 중 수 백년간 각종 전쟁을 겪으면서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쓰러져간 조상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국가에서 사당을 지어주고 관리를 해 준다면 나라 예산이 다른 곳에 쓰여지지 못하고 모두 그분들을 위해 쓰여져야 하지 않겠는지...
충민사 수의문
전상의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민사
전상의 장군의 영정
전상의 장군을 모시고 있는 충민사는 지금도 광주사람들에게는 낯선곳이다.
그만큼 다가서기 어려운 오랜 앙금이 남아있는 것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학살자 전두환에서 파생된 것이니, 본은 틀려도 전두환과 시조가 같은 전상의장군이 감당해야 할 몫은 아닐는지, 그것은 알게 모르게 광주사람들 뇌리에 박힌 전두환의 한 뿌리 머나먼 조상이지만 병자호란때의 장군이라는 것을 미화하기위해 세웠다는 추측도 어쩜 감내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어쩌다가 광주 3충신 중 한 분이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는지...
참으로 애석하도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트위터 ☞ http://twitter.com/huhasim
지도:4]
k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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