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해설

[스크랩] 무등산 역사길의 종점 환벽당(무등산 구석구석을 찾아서 5부7편)

산술 2016. 1. 15. 12:20

 

지난 무등산 구석구석을 찾아서 시리즈 연재시 5부6편 무등산 옛길3구간 역사길을 따라 가다 광주호 호수생태원에서 다음 코스인 환벽당을 가지 못하고 탐방이 일단락 되고 말았다. 그 아쉬움이 물밀듯 밀려와 재작년 여름에 갔던 포스팅 사진을 이용하여 마지막편을 만들려다 도저히 양심히 허락치 않아 결국은 환벽당을 가고 말았다.

여름 환벽당과 겨울 환벽당의 다른 모습에서 김윤제의 마음도 읽어보고 싶었고, 여기서 어렸을 적 수학했던 송강 정철과 서하당 김성원, 그리고 충장공 김덕령 장군 형제 등의 모습도 다시 그려보고 싶었기 때문이며, 사진을 옛것을 쓰기가 나 자신에게 용납치 않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탐방은 설날 하루전날 어머니가 계시는 곡성으로 가는 길에 들렀으며, 비교적 이른 시간에 무등산 주변의 충민사와, 충장사 등의 탐방도 아울러 진행되었고, 무등산 역사길의 종점인 환벽당 바로 옆에 있는 취가정까지 탐방하게 되었다.

취가정을 넣은 이유는 무등산 역사길의 종점을 환벽당이 아닌 취가정까지 연장하자는 문제제기의 일환으로 넣게 되었다.

 

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광주시와 담양이 갈리는데, 김덕령장군의 후손들이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운 취가정은 김덕령장군의 유적지이다.

역사길이 김덕령장군의 묘와 사당이 있는 충장사에서 시작하였다면, 김덕령장군의 아우 김덕보의 풍앙정사, 김덕령 장군의 생가터와 정려비각, 김덕령 장군이 어릴적 공부했던 환벽당에서 끝나지 말고 김덕령장군의 억울함을 권필의 꿈에 나타나 노래하였다는 취가정까지 마땅히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환벽당에서 50m만 더 가면 취가정인데, 왜 환벽당에서 역사길이 끝나고 말았을까? 라는 조그만 동기가 취가정까지 가게 만들었다.

 

그래서 5부7편은 환벽당, 5부8편은 취가정, 5부9편은 충민사, 5부10편은 충장사로 이어지며 1차 무등산 구석구석을 찾아서는 끝나게 된다.

2차 부터는 꽃피는 봄부터 전혀 색감이 다른 무등산을 찾을 생각이니 좋은 사진과 좋은 글로 계속 무등산 구석구석을 찾아서는 이어질 예정이니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이 있으시길 미리 기원해 본다.

 

 

충효교를 건너가면 담양이요 이곳은 광주이다.

광주호의 70%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담양군에서 작년 말 광주호 지명을 성산호로 바꾸었다고 하니, 십수년간 사람들 뇌리에 박혀있는 광주호의 이름을 굳이 성산호로 바꾼것은 송강정철의 성산별곡의 무대가 바로 이곳 광주호 상류인 창계천, 식영정, 서하당, 환벽당 등과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환벽당을 가려면 다리를 건너지 말고 우측 냇가를 따라 가면 되는데 바로 그곳에서 부터 환벽당 이야기는 시작되니 차를 가지고 환벽당까지 가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환벽당 앞에는 주차장이 없기때문이다..ㅎ

 

 

무등산 옛길3구간은 장원삼거리에서 충장사까지를 나무꾼길이라 하고 충장사에서 환벽당까지를 역사길이라고 한다.

역사길은  도요지, 삼괴정을 제외하고 대부분 충장공 김덕령장군과 관계가 있으며, 삼괴정은 둘러보지 않았기에 다음 2차에서 식영정 뒷산으로 올라 소쇄원으로 내려올때 들러보기로 한다.

 

 

환벽당 앞을 유유히 흐르는 창계천, 먼 옛날은 이보다 더 얕았을 것이지만 광주호의 준공으로 물이 많이 불어있다.

정철이 16세때 지실마을에서 살다가 순천에 살던 형을 만나러 가다 날이 더워 창계천 용소에서 멱을 감고 있는데, 당시 환벽당에서 낮잠을 즐기던 김윤제의 꿈에 용소에서 용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 꿈에서 깨어 하도 신기해 용소로 가 보니 어린 정철이 멱을 감고 있었더라는...결국 이런 저런 말을 주고 받은 후 정철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순천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고 16세에 자신의 제자로 삼아버렸으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곳이 바로 이곳 창계천 용소이다.

 

 

조대(釣臺)라고 하는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겠으나, 김윤제가 환벽당으로 찾아온 손님들과 어울려 낚시를 즐겼다는 조대는 광주댐 건설로

지금은 잠겨있다고 한다...아마도 저 너럭바위가 아닐지..

 

 

살얼음 낀 창계천에 긴 가지를 밀어넣고 얼마나 추운지 몸소 체험하고 있는 수양버들.

 

 

 

무등산 옛길 3구간은 무려 11.3km나 된다.

무등산 옛길 1구간(산수동 오거리~원효사지구)이 7.75km, 2구간(원효사지구~서석대)이 4.12km로 1,2구간 합이 11.87km인 것에 비하면

무등산 옛길 3구간이 얼마나 긴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중간을 잘라 나무꾼길과 역사길로 나누어 탐방하게 하는 기지를 발휘한 듯.

 

 

                    무등산 역사길의 정점을 알리는 표지판.

                    16세기경 지은 환벽당은 역사길의 종점에 있고, 1890년에 세운 취가정은 역사길에서 빠져있다.

                    역사길에 있는 삼괴정이 1900년 구한말에 세워진 것을 감안한다면, 취가정도 분명 역사길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환벽당 앞 창계천 쌍송앞에 세워진 정철의 성산별곡 시비.

성산별곡은 정철이 25세때 지었다고 하지만, 글 내용을 보면 서하당 김성원의 풍류세상살이를 부러워 한 내용이 많아 40세때 처음으로 창평으로 낙향하여 있을 때 이곳 식영정옆 서하당을 오가며 쓴 것으로 보인다는것이 정설이다.

참고☞ 식영정에 오른 송강정철, 성산별곡을 노래했건만

 

 

광주시 북구 충효동 387번지, 환벽당길 10번지 환벽당으로 이제 올라가 볼까?

 

 

몸도 마음도 정철, 김성원, 김덕령, 김덕보 등이 공부하러 올라다닌 이 돌 길을 따라 올라간다. 

 

 

환벽당은 나주목사 김윤제(金允悌 1501~15720가 관직을 떠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교육에 힘쓰던 곳으로 처음에는 벽간당이라고 불렀다. 앞면3칸, 옆면2칸 팔작지붕건물로 원래는 전통적 누정형식이었으나, 훗날 다시 세우면서 가운데 2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바꾼것으로 보인다고..

 

 

 

 

 

김윤제(金允悌 1501~1572)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로(恭老) 호는 사촌(沙村)으로, 증조부 김자침은 진사로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조부 김문손은 진사로 참판에 증직되었고, 아버니 김후는 진사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정랑과 현감을 역임하였으며, 어머니는 여산김씨이다.

1528년(중종23)에 무자(戊子)식년시(式年試)에 진사(進士)2등 7위에 합격하였고, 1531년(중종26) 신묘식년시 병과 23위로 급제하였다.

직강, 홍문관교리,전중어사 겸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하였고, 전주진영 병마절도사, 부안군수, 나주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으로 나갔다.

나주목사로 있을 때 고봉 기대승이 <주자대전>에서 뽑아 엮은 <주자문록>4책을 간행하였다.

 

관직을 떠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양성을 하였는데, 송강 정철(1536~1593)과 종질인 서하당 김성원 등이 대표적인 제자이고,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김덕령과 김덕보형제는 종손으로 김윤제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성산당으로 물러나 환벽당이라는 정자를 짓고 술잔을 들고 시을 읊으며 스스로 즐겼는데, 당시 호남의 이름있는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어울리며 시단을 형성하였다.

김윤제가 교유한 사람들은 송순, 임억령, 김인후, 소세양, 양산보부자, 양응정, 기대승, 김성원, 정철, 고경명, 삼당시인으로 이름난 백광훈 등이다.

이들 대부분은 호남사림으로 서로간의 정신적 유대감이 깊었으며,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거치면서 시대의식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참고문헌]광신김씨 대종회 홈페이지

 

 

 

 

 

환벽당 제액은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썻으며 당호는 신잠(申潛1491~1554)이 지었다.

정철은 16세가 되던 해 김윤제의 제자로 환벽당에 들어왔고 이곳에서 글을 배우며 김윤제의 외손녀와 혼인까지 하였고, 관계에 진출하는 27세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김윤제 등의 뒷바라지를 받는다.

 

 

환벽당 아래쪽 넓은 부지에 김윤제의 본체가 있었다고 한다. 환벽당은 본체의 후원격으로 푸른대나무에 둘러쌓여 있다고 해서 환벽당(環碧堂)이라 불렀고, 그 전에는 벽간당이라고 불렀다. 본체와 후원 사이에는 직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환벽당에 걸려있는 조자이(趙子以)의 시

                                    

丞相故墟何處尋 (승상께서 사신 옛터 어느곳에 찾을런지)

鳴陽縣郭瑞湖潯 (명양고을 서호 위에 그의 유적 남아 있네)

淸名直節賢孫繼 (맑은 이름 곧은 절개 어진 자손 이어가고)

餘韻遺風過客欽 (남긴 여운 맑은 유풍 지난 손이 흠모하네)

環碧亭空新易主 (비어있는 환벽정자 새주인이 바뀌었고)

棲霞堂在古猶今 (그 옛날의 서하당이 아직까지 건재하네)

通家小子悲吟地 (통가하는 이 소자가 찾아와서 읊조리니)

老木寒波無限心 (늙은 나무 찬 물결에 이 마음이 설레이네)

 

조자이의 시는 정철의 4대손인 정수환이 김윤제의 후손으로 부터 환벽당을 사들인 후 김윤제 문하의 후손인 조자이가 환벽당에 들렀다가

쓴 시로 보인다. 서하당은 서하 김성원이 장인이나 스승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식영정 아래에 있는 정자를 말한다.

 

 

 

환벽당에 걸려있는 임억령(林億齡)의 시

烟氣兼雲氣 (연기의 기운인지 구름까지 겸했는지) 

琴聲雜水聲 (거문고 소리인지 물소리가 섞이었는지) 

斜陽乘醉返 (석양무렵 거나하게 취해서 돌아오니)  

沙路竹與鳴 (모래길에 대밭가마 소리쳐 우네)

 

김윤제와 임억령은 동시대 사람으로 임억령이 지은 지는 김윤제가 환벽당을 지었을 때 기념으로 써 준것 같다.

 

 

 

환벽당안에 앉아 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본다.

우측으로 멀리 무등산 자락이 한 눈에 보이고,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본체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이 방에서 김윤제는 어린 정철과 김성원을 가르쳤고, 김덕령 김덕보 형제도 가르쳤다. 그리고 송순, 임억령, 김인후, 소세양, 양산보부자, 양응정, 기대승,고경명, 백광훈 등 당대의 고명한 학자들과 교유하였고, 어린 정철은 그들에게서도 학문을 배웠고, 임억령에게는 시를 배우며 자랐다고 한다.

정철의 성산별곡에는 환벽당 근처의 산수경관을 담고 있어 환벽당이 정철의 어린시절부터 얼마나 마음속에 크게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다. 김윤제의 환벽당을 드나들던 학자들 대부분은 호남사림으로 서로간의 정신적 유대감이 깊었으며, 기묘사화, 을사사화를 거치면서 새대의식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다.

 

 

 

 

마루에 나오면 이렇게 창계천도 내려다 보이고..

 

 

뒷간도 지척에 있다. 왼쪽은 큰것을 보는곳. 오른쪽은 작은 것을 보는곳..

옆의 집은 훗날 김윤제의 후손으로 부터 환벽당을 사들인 정철의 세째아들 정근명의 3대손 정수환의 후손이 관리하며 사는 듯..

 

 

 

 

환벽당에서 내려와 김윤제의 본체가 있었다는 넓은 뜨락을 거닐며 연못에서 환벽당을 바라본다.

저기 위에서 공부하다 잠시 나와 쉬고 있는 정철과 김성원이 보이고...한 참뒤에  김덕령 김덕보 형제도 보인다.

임억령도 보이고,  양산보도 보이고, 기대승도 보인다...

잠시 그들의 바쁜 걸음을 바라보고 쌍송이 있는 창게천 옆으로 가 본다.

 

 

환벽당 앞 창계천가의 조대쌍송은 정철의 성산별곡에 나오는 나무이다.

 

짝 맞은 늘근 솔란 조대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갈대로 던져두니/

홍료화 백밴주 어느 사이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히 배 앞에 닿았더라/

 

옛날에는 창계의 용소에서는 뱃놀이도 행해졌고, 조대에서는 낚시도 했다고 하니, 식영정과 환벽당 사이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풍류를 즐겼을 임억령과 김윤제의 모습이 창게천에 반영으로 나타난다.

 

 

 

 

좌측으로는 환벽당이 있고, 창계천 건너 식영정이 있고...

 

 

무등산 옛길 3구간 역사길의 마지막 정점인 환벽당의 겨울은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재 작년 여름에 들렀으니 긴 시간이 흘렀지만, 변한 것은 전혀없듯이 2년이란 세월에 100을 곱하여도 역시 변한것은 없을 것이며, 이 맑고 푸른 물이 오몀되고, 강가에 핀 갈대가 말라 죽는 것을 김윤제는 원치 않을 것이다. 무등산 가사문화권을 드나드는 연간 수백만명의 관람객들 모두 남도가사문화의 보고이자 우리나라 가사문화의 보고인 무등산 가사문화권을 아끼고 보호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상태로 수백년 수천년을 계속 우리의 후손들은 환벽당을 보게 될 것이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트위터http://twitter.com/huhasim

   지도:4]

          

kak

출처 : simpro의 반 백년 이야기
글쓴이 : simpro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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