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해설

[스크랩] 김덕령장군의 억울함을 노래한 취가정(무등산 구석구석을 찾아서 5부8편)

산술 2016. 1. 15. 12:20

 

충장공 김덕령 장군은  1596년 7월 홍산(鴻山)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까지 진군했다가, 이미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이 떨어지지 않자 다시 진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관찰사 종사관 신경행과 모속관 한현의 무고로 최담년, 곽재우, 고언백, 홍계남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에 정탁, 김응남 등이 그의 무고를 힘써 변명했으나 20일 동안에 여섯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옥사하고 말았다.

 

그 후 권필의 꿈에 김덕령이 술에 취해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 하는 노래를 부르자, 권필이 그를 위로하는 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으며, 김덕령장군이 취했을 때 부른 노래라는 뜻으로 취가정(醉歌亭)이라 불렀으며, 1889년(고종27)김만식 등 후손들이 김덕령장군 이 어릴적 공부했던 환벽당 근처에 세웠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55년 다시 세웠다.

 

 

무등산 옛길3구간의 종점이 바로 옆 환벽당에서 끝나지만 글쓴이의 생각으로는 50m더 연장하여 취가정까지 와야 한다는 것이다.

김덕령장군의 묘소와 사당이 있는 충장사에서 시작한 역사길이 김장군의 아우 김덕보의 풍암정사에서 형제간의 우애를 느껴보고, 충효리 정려비각이 있는 충효동에서 김덕령장군과 부인 흥양이씨, 김덕령 장군 삼형제의 충절을 되새겨 보고, 김덕령장군의 생가터에서 충장공의 어린시절을 그려본 다음, 동생 김덕보와 함께 김윤제 밑에서 학문을 공부했던 환벽당까지 그의 흔적을 따라갔다면, 그의 억울한 옥사를 권필에게 하소연 한 취가정에서 그의 누명을 벗겨주는 것이 역사길의 진정한 의미라 하겠다.

 

 

환벽당에서 나와 조대쌍송을 바라보고 창계천을 따라 50m정도 더 가면 오른쪽으로 정자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나온다.

여름에는 대숲과 솔숲에 가려 잘 안보이지만, 겨울엔 이처럼 표지판까지 시원하게 보이니 환벽당까지 왔다면 반드시 취가정까지 둘러보고 가는 것이 김덕령 장군을 제대로 보고 가는 것이라 하겠다.                                                                                .

 

 

네 기둥에 붙은 주련글씨는

 

聲閒于天 (하늘에 대고 고요히 노래하니)

忠貴日月 (곧은 마음은 해와 달을 꿰뚫으네)

氣壯山河 (기운은 산하에 넘쳐)

醉歌於地 (이 땅에 취하도록 노래하네)  

 

 

김덕령의 취가시(醉詩歌)

 

醉詩歌此曲無人聞   (취해서 부르는 노래 이 곡조 듣는 사람 없네)

我不要醉花月         (꽃과 달에 취하면 무엇하리)

我不要樹功勳         (공훈을 세운들 무엇하리) 

樹功勳也樹浮雲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구름이요) 

醉花月也是浮雲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라)

醉時歌此曲無人知   (취해서 부르는 노래 내 마음 누가 알까)

我心只願長劍奉明君(다만 긴 칼 부여잡고 임금께 보은할 수 있기만을 원하노라)    

 

권필의 화답가(和答歌)

 

將軍昔日把金戈  (장군께서 예전에 칼을 잡으셨나)   

壯志中최奈命何  (장한 뜻이 중도에 꺽이니 이 또한 운명이로고)
地下英靈無限恨  (지하에 계신 영령의 한 없는 원한이여)

分明一曲醉時歌  (분명 이 노래는 취시가로구나)


        

설주(雪舟)송운회(宋運會)가 쓴 현판

송운회는 1874년(고종11)율어면 금천태생으로 중국, 조선의 서예 명인체를 답습, 독특한 설주체를 완성했으며, '설주의 먹물에 보성강이 검게 물들었다'라는 전설이 있으며, 마지막 일심(一心)이란 두 자를 남기고 92세로 별세하였다.

 

 

석주 권필(石洲 1569~1612)

 

남의안동권씨로 권근의 6대손, 아버지 권벽과 어머니 경주 정씨사이에 다섯째 아들로 마포 서강 현석촌에서 출생하였다.

송강 정철의 제자로 성품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를 싫어했으며, 1587년 19세 때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한 글자를 잘 못 써서 출방당한 후

23세 때 스승 송강 정철이 모함을 받아 귀양을 가고, 다시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강화에서 운명하자 벼슬을 마다하고 산수를 벗삼아 시주(詩酒)를 낙으로 살았던 당대의 뛰어난 저항시인이었다. 그의 다섯형제 모두 시로 이름이 높아 연주집(聯珠集)이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용과 함께 당시 재상이던 유성룡과 이산해의 목을 베라고 상소하여 조야를 들끓게 했으며,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고,

임진왜란 이후 세상에 뜻을 접고 강화도에 머물렀다.

선조와 광해군 시대의 한문학의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대표되는 당대 문단에서 동악 이안눌과 함께 양대산맥의 최고 시인으로 평가받았으며, 강화도에 머물 때 많은 유생들이 몰려오자 석주초당을 열고 이들을 모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33세때인 1601년 이정구가 대문장가로 알려진 명나라 사신 고천준을 접반할 문사를 엄선할 때 야인으로서 제술관에 임명되어 문명을 떨쳤다.

이후로도 접빈의 행사에 참여하여 이름을 날렸으며, 동몽교관을 제수받았으나 곧 사직하는 등 불의를 꾸짖고 서슬 푸른 풍자를 서슴치 않았는데, 광해군 초에는 권신이었던 이이첨이 교제하기를 청하여도 끝내 거절할 정도로 강직하였다.

 

광해군의 비(妃) 유씨의 아우 유희분 등 척족(戚族)들의 방종을 궁류시(宮柳詩)로 비방한 사실로 이듬해인 1612년 발생한 김직재의 무옥(誣獄)에 억울하게 연좌되자 광해군이 대노하여 혹독한 고문으로 친국을 당하고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밖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술을 대접하였는데, 이 때의 폭음으로 장독이 도져 이튿날 민가에서 4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 후 석주 권필의 죽음은 인조반정의 구실이 되기도 했으며, 인조반정 후에는 사헌부 지평에 추증되었다.

권필은 건제 김천일(健齊 金千鎰)장군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던 무등산 화암마을의 해광 송제민(海狂 宋齊民)의 사위이며 화암마을에 있는 운암서원 (雲巖書院) 운암사(雲巖祠)에 해광 송제민과 함께 제향되고 있다.

출처:의병장 김덕령을 기리는 취가정 / 무하mooha

 

 

 

취가정에서도 문을 열면 무등산 자락과 창계천이 보이지만, 지금 천정은 빗물이 샜는지 주저앉아있어 빠른 보수가 필요해 보인다.

 

 

 

다산초당의 다조(茶竈)를 닮은 바위가 마당앞에 있다.

 

 

멀리 무등산 자락이 보이고,

 

 

솔숲너머로 창계천이 보인다.

취가정을 나오면서 임진년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장군의 명성을 시기한 사람들이 1595년 이몽학의 난에 가담했다고 그에게 누명을 씌우고 결국 선조의 국문을 받게되자 유성룡이 그의 무고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20여일의 혹독한 국문을 결국 감당하지 못한 채 29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를 하게된 김덕령 장군을 생각해 본다.

얼마나 억울했으며,권필의 꿈에 나타나서까지 억울함을 취가시로 하소연 했을까.

 

역사란 충성을 다해 나라를 지킨 이들을 시기하는 중상모략꾼들의 이간질에 놀아나는 임금의 가려진 눈에 의해 기록되어 왔기에, 그들의 충절을 결국 역모로 몰아붙힌 역사의 간신배들을 이제 모두 하나씩 추려내어 새로운 역사의 법정에 세워야 할 것이다.

이 취가정은 비록 남도 가사문학과는 관계가 없지만 김덕령장군의 역사길과는 엄청난 상관관계가 있기에 반드시 무등산 옛길 3구간 역사길의 종점은 환벽당이 아니라 취가정에서 끝나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트위터http://twitter.com/huha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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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

출처 : simpro의 반 백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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