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 강은교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살짝 가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가을 / 김용택
가을입니다
해질녘 먼 들 어스름이
내 눈안에 들어섰습니다
윗녘 아랫녘 온들녘이 모두
샛노랗게 눈물겹습니다
말로 글로 다할 수 없는
내 가슴 속의 눈물겨운 인정과
사랑의 정감들을 당신은 아시는지요
해지는 풀섶에서 우는
풀벌레들 울음소리 따라
길이 살아나고 먼 들 끝에서 살아나는
불빛을 찾았습니다
내가 가고 해가 가고
꽃이 피는 작은 흙길에서
저녁 이슬들이 내 발등을 적시는
이 아름다운 가을 서정을
당신께 드립니다
가을 / 김종길
먼 산이 한결 가까이 다가선다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진다
가을이다
아 내삶이 맞는 또 한 번의 가을!
허나 더욱 성글어지는 내 머리칼
더욱 엷어지는 내 그림자 해가 많이 짧아졌다
가을 / 마종기
가벼워진다
바람이 가벼워진다
몸이 가벼워진다
이곳에
열매들이 무겁게 무겁게
제 무게대로 엉겨서 땅에 떨어진다
오, 이와도 같이
사랑도, 미움도, 인생도, 제 나름대로 익어서
어디로인지 사라져간다
가을 / 박경리
방이 아무도 없는 사거리 같다
뭣이 어떻게 빠져 나간 걸까
솔털같이 노니는 문살의 햇빛
조약돌 타고 흐르는 물소리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른다. 그리고 있다
세월 밖으로 내가 쫓겨난 걸까
창밖의 저만큼 보인다
칡넝쿨이 붕대같이 감아 올리자 나무 한 그루
같이 살자는 건지 숨통을 막자는 건지
사방에서 숭숭 바람이 스며든다
낙엽을 말아 올리는 스산한 거리
담뱃불 끄고 일어선 사내가 떠나간다
막바지의 몸부림인가
이별의 표현인가
생명은 생명을 먹어야 하는
원죄로 인한 결실이여
아아 가을은 풍요로우면서도
참혹한 계절이다 이별의 계절이다
가을 / 유안진
이제는 사랑도 추억이 되어라
꽃내음보다는 마른 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며
눈 감은 채 고즈너기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 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소 등불 하나 켜놓고 싶어라
서 있는 이들은 앉아야 할 때
앉아서 두 손 안에 얼굴 묻고 싶은 때
두 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리거라
가을 / 윤희상
일하는 사무실의 창 밖으로
날마다 모과나무를 본다
날마다 보는 모과나무이지만
날마다 같은 모과나무가 아니다
모과 열매는 관리인이 따다가
주인집으로 가져가고
모과나무 밑으로 낙엽이 진다
나의 눈이
떨어지는 낙엽을 밟고
하늘로 올라간다
낙엽이 계단이다
가을 / 이안
병든 나뭇잎 먼저
더 많은 벌레를 먹인 나뭇잎 먼저
아픔이 먼저
아픔에게 문병 간다
가을 /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가을 / 최승자
세월만 가라, 가라 그랬죠
그런데 세월이 내게로 왔습니다
내 문간에 낙엽 한 잎 떨어뜨립디다
가을입디다
그리고 일진광풍처럼 몰아칩디다
오래 사모했던
그대 이름
오늘 내 문간에 기어이 휘몰아칩디다
이 계절은 가짜다 / 심여수
낭설처럼 피었다지는 풍로초
연한 꽃잎 한 장 지상으로 추락하며
천상의 태양을 떠받는 동안
첫 혈흔의 붉은 꽃송이 같은
사랑을 품었던 계절이 오면
나약한 나의 심기는 실어증을 앓는다
내 기다림은 고작 또 다른 욕망이
만개할 날을 기다릴 뿐인가
욕망의 선전문구로
낱낱이 발가벗겨지는 순간
수척한 그림자 위로
내마음 전부를 싹 쓸어버릴
낯선 바람의 애무에 온몸의 촉수가 선다
쓸쓸한 것 끼리 갈대밭으로 몰려가며
붉은 것 끼리 맨드라미 속으로 몰려가며
풍경의 온갖 미혹으로 몰아세우는
이 계절은 가짜다
네가 없는 이 계절은 모두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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