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해설

[스크랩] 무등산국립공원의 비경 입석대(무등산 구석구석을 찾아서 1부4편)

산술 2016. 1. 15. 12:39

 

입석대는 서석대와 광석대와 더불어 무등산의 3대 암석지대로 서석대 미래의 모습이라고 한다.

지금의 서석대는 온전히 서 있지만 입석대를 보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한 모습이 위태위태해 보여 언제 침식작용으로 무너질 지 모르기에

입구에서 부터 금줄을 쳐 놓고 엄격하게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지금도 서석대는 조금씩 침식작용으로 뒤로 물러나고 있다하며 먼 훗날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서석대도 입석대처럼 돌기둥만 남게되어

무너져 버린 신전의 기둥처럼 우리를 맞이할 지 모른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덕산너덜이나 지공너덜처럼 새로운 너덜지대를 만들지도...

 

 

입석대로 가려면 서석대에서 천왕봉과 반대방향으로 내려가면 된다.

장불재에서 온다면 입석대부터 먼저보고 서석대로 오를 수 있지만, 우리는 군작전도로를 따라 왔기에 옛길 2구간과 같은 코스로

서석대로 먼저 올라 입석대를 거쳐 장불재로 내려가는 길인 것이다.

입석대 방향에서 올라오면 경사가 완만하고 볕이 잘 들어있기에 날씨가 포근하다면 눈이 금새 다 녹아내린다.

반대편 작전도로상에서 올라오는 길이 급경사에 음지로 겨우내 눈이 안녹는 것에 비하면 실크로드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입석대의 한 무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입석대는 거대한 돌 기둥의 무리로 군데군데 흩어져 있지만 한군데에 무리지어 있는 곳을 입석대라고 부른다.

 

 

서석대에서 입석대를 향해 내려가다 보면 수 많은 독립된 입석들을 만날 수 있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입석들이 마치 신전의 무너진 기둥처럼 갖가지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그 사이로 내려오는

산님들의 모습이 고대 유적사이를 지나오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봄철이면 이러한 입석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멋진 진달래와 철쭉의 모습은 환상 그 자체이다.

진달래나 철쭉이 돌 틈 사이에서 피어 나는 모습은 마치 소나무가 바위틈에서 자라는 신비와 같은 모습이다.

 

 

 

입석대로 가면서 숱하게 흩어져 있는 입석의 군상들을 만나본다.

 

 

 

 

입석대 못가서 보이는 이 거대하게 생긴 누운바위는 승천암이라고 한다.

옛날 입석대 부근에는 암자가 있었는데 무엇엔가 쫓기던 산양을 스님이 숨겨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스님의 꿈에 이무기가 나타나 산양을 잡아먹고 승천해야 하는데 네가 훼방을 놓아 승천을 못했다.

만약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너라도 잡아 먹어야 겠다고 했다한다. 얼마후 난데없이 우렁찬 종소리가 들렸고

이무기는 곧장 스님을 풀어주고 승천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승천암 앞에는 누군가 바위에 승천이라고 글자를 파 놓았다.

 

 

 

기다란 직사각형으로 잘 다듬어진 입석들...

 

 

입석대는 제봉 고경명이 친구들과 함께 무등산을 찾아 기록한 무등산 등산기인 유서석록(遊瑞石錄)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광주에서 태어난 제봉 고경명(1533~1592)은 1591년까지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에게 제거되어 파직된 후 낙향하여 지내다 이듬해(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지리멸멸하게 되자 이에 격분하여 격문을 돌려 무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모아 담양 등지에서 진용을 편성하였고

이어 북진하여 관군과 함께 왜군과 맞서 싸우다 충남 금산전투에서 작은아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으로 그가 남긴 유서석록(遊瑞石錄)에

의하면,

 

 

1574년 초여름 친구들과 무등산을 찾은 고경명은 증심사에서 출발하여 서석산에 올라 내려오는 5일 동안의 행적을 여행기로 남기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경명이 첫 번째로 들른 곳은 취백루(翠栢樓)로 이 이름은 ‘백수정전취(栢樹庭前翠)’에서 따서 지은 것이라고 했다.

증각사(證覺寺)·사인암(舍人巖)·냉천정(冷泉亭)·도솔사(兜率寺)·입석암(立石菴)·불가사의사(不可思議寺)·원등사(元燈寺)·천왕봉(天王峰)·

비로봉(毘盧峰)·삼일암(三日菴)·월대(月臺) 등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고, 그밖에 또 돌 하나가 수십척이나 되는 것이 하늘을 향하여 홀로

서 있는데 그 속에 청동(靑銅)으로 만든 9층의 금탑(金塔) 아홉개가 간직되어 있어서 절 이름을 금탑사(金塔寺)라고 하는 절도 돌아보았다.

 

 

 

 

 

 

 

은적사(隱迹寺)·석문사(石門寺)·금석사(錦石寺)·대자사(大慈寺)·소은굴(小隱窟) 등도 구경한다.

광석대(廣石臺) 앞에는 삼존석(三尊石)이 있다. 그 높이가 위로 나무 끝까지 나와서 아득히 올려다보여 대(臺)의 웅장함을 더하여 주었다고 한다.

다시 문수암(文殊菴)·자월암(慈月菴)·풍혈대(風穴臺)·장추대(藏秋臺)·송하대(送下臺)·방석보(方石洑)를 거쳐서 양산보(梁山甫)의 별장 소쇄원(瀟灑園)에 도착하고 다시 식영정(息影亭)을 거쳐 서하당(栖霞堂)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이 주 내용으로 자세한 것은 그의 문집 제봉집(霽峰集)에 수록

되어 있다고 한다.(자료출처 : 네이버 백과)

 

 

또한 그는 '네모퉁이를 반듯하게 깎고 갈아 층층이 쌓아올린 폼이 마치 석수장이가 먹줄을 튕겨 다듬어서 포개놓은 듯한 모양이다.'

이어 '천지개벽의 창세기에 돌이 엉키어 우연히 이렇게도 괴상하게 만들어졌다고나 할까. 신공귀장(神工鬼匠)이 조화를 부려 속임수를

다한 것일까? 아아 ,누가 구워냈으며, 누가 지어부어 만들었는지, 또 누가 갈고 누가 잘라냈단 말인가? 아미산의 옥으로 된 문이 땅에서

솟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성도의 석순이 해안을 둘러 진압한 것이 아닐까? 알지 못할 일이다.

돌의 형세를 보니 들쭉날쭉하게 떨기져 뽑혀나고 무리져 나와서 아무리 계산 잘하는 자라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니 열여섯 개 봉우리라고 하는 것은 다만 눈으로 보이는 것만 근거로 삼아 그 대강만 헤아려 둔 것일 따름이다.

암석대의 봉우리들이 길게 이어져 날개를 편듯한 형상을 한 것은 마치 사람이 펼쳐서 깍지끼고 있는 듯한데 암자는 바로 그 중간에 있다.

우러러보면 위태로운 바위가 높이 솟아서 곧 떨어져 눌러버리지 않을까 해서, 두려워서 머물러 있기가 불안하기 그지없다.

바위 밑에 샘이 있어 모두 두 곳인데, 하나는 암자의 동쪽에 있다. 하나는 서쪽에 있다. 아무리 큰 가뭄에도 줄지 않는다 하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다.' 라며 입석대의 형성과정과 주변의 암자 등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이렇듯 고경명은 자신의 고향에 있는 무등산을 어려서부터 몇 번이나 올라서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사실 보기만 하였지 그 진수를 알지 못했었다 하여, 광주에 50년 넘게 살고 있음에 그동안 200여차례가 넘게 올라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지만 아직도 그 진수를 알지 못한 평범한 범부인 글쓴이와 어쩜 이리도 마음이 동할까.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입석대의 나이는 9천만 살 정도 된다고 하는데 제주도와 한탄강의 주상절리대가 20만 살 정도밖에 안되기에 그들을 입석대와 비교한 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할 것이다.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의하면 과거 입석대 부근에는 입석암, 상원등암, 상일암을 비롯한 10여개의 자그마한 암자가

                    바위 사이사이에 자리하고 서로 어우러져 무등산 제일의 명소라고 하였다.

                    지금은 모두 없어져 그 흔적이라고는 기둥으로 세웠던 구멍뚫린 주춧돌밖에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먼훗날의 서석대의 모습을 미리 입석대에서 발견한다고 하니 2005년 12월 16일에서야 천연기념물로 보호된 어리석음에 장탄식을 늘어놓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 무등산이 국립공원이 되어 서석대와 입석대와 같은 주상절리대가 본격적으로 나라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는 도립공원이 된지 40년만에 21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어 무등산은 할 일이 더 많아졌다고 할 것이다.

장불재와 중봉 등에 산재한 방송사 중계탑을 한 군데로 통합하거나 이전하고, 정상을 45년간이나 점령중인 군부대도 이전해서

무등산의 정상인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을 국민의 품으로 다시 찾아 오는 것일 것이다.

혹자들은 무등산이 국립공원이 되면 다니던 등산로가 모두 폐쇄되거나 비지정등로가 되어 오르지 못하는 규제에 촛점을 맞추나

더 멀리 바라본다면 군부대 이전으로 우리가 찾아야 하는 정상을 더 빠르게 찾아올 수 있다는 긍정에 더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또한 천연기념물인 서석대와 입석대 광석대 등의 주상절리 들을 유네스코에 등재해 무등산이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되는

노력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무등산이 국립공원으로 되면서 더욱더 탄력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무등산이 국립공원이

되었음을 환영하지 않겠는가.

입석대를 지나면서 보이는 곳은 장불재이다.

장불재에는 KBS,KT송신탑이 있으며 대피시설과 도립공원 관리사무소, 그리고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있어

무등산을 찾는 수백만 명의 산님들에게 최고의 휴식터이자 피난처 구실을 해 주고 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무등산의 대표적인 고개인 장불재와 중머리재는 소개하지 않고 다음 포스팅에서

무등산 등산 코스를 소개하면서 할 예정이며, 장불재에서 산자락 앞 왼쪽으로 난 길은 암석대로 가는 길로

그방향의 삼존석에 있는 송하, 광석, 풍혈, 장추, 청학, 송광, 능암, 법화, 설법, 은신 등 10개의 석대도 다음에 소개하고자 한다.

 

 

 

장불재에서 바라본 입석대

 

 

장불재에서 바라본 서석대

 

 

이제 중머리재를 거쳐 새인봉으로 간다.

장불재와 중머리재는 무등산 서석대로 가는데 거치지 않고 갈 수는 있지만 무등산의 사통팔통 대로 최고의 중심지로서

무등산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이 곳을 거치지 않고 무등산에 왔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등산로의 요지중의 요지이다.

그 포스팅은 등산코스를 소개하면서 다시 하기로 하고 이번 포스팅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글 : 포토뉴스코리아 simpro) 트위터http://twitter.com/huhasim

   지도:4]

          

출처 : simpro의 반 백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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