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 松江 鄭澈
우리는 송강 정철(송강 정철. 1536~1593)을 가사문학의 일인자로 꼽는다. 그가 쓴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은 지금까지도 한국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정철이 이룩한 문학적 공로와 명성을 생각하면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앟는다.
그러나 정철은 정치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조선시대 최대의 정치 참사로 일컬어지는 기축옥사(시축옥사).. 1,000여명의 조선 선비들이 죽임을 당한 그 회오리바람의 주심에 바로 정치인 송강 정철이 있다. 천하의 문객이 왜 이런 비극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일까? 잔인한 죽음들과 관련된 정철의 행적은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여립의 난 鄭汝立의 亂 ...
송강 정철을 알기 위해서는 정여립의 난(鄭汝立의 亂)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정철의 詩人의 삶과는 별도로 정치인으로서의 정철은 정여립의 亂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정여립(鄭汝立 .. 1546~1589)의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인백(仁佰)이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첨정(僉正)을 지낸 정희증(鄭希曾)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통솔력이 있고 명석하였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1570년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율곡과 成渾의 문하에 있으면서 西人에 속하였으나, 율곡이 죽은 뒤에는 東人에 가담하여 율곡을 비롯하여 西人의 영수인 박순, 성혼을 비판하였다. 이로 인하여 宣祖의 미움을 받아 관직을 물러났으나, 인망이 높아 낙향한 뒤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전북 진안군의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세워 활쏘기 모임(射會)을 여는 등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무력을 길렀다. 이때 죽도와의 인연으로 竹島先生이라고 불리었다. 1587년에는 전부부윤 남언경(남언경)의 요청으로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후 황해도 안악(安岳)의 변숭복(邊崇福), 海州의 지함두(池函斗), 운봉의 승려 의연(義衍) 등의 세력을 끌어모아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1589년(선조 27) 홍해도 관찰사 한준(韓準)과 안악군수 이축(이축), 재령군수 박충간(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얼 때를 기다려 한양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발하였다. 이에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이 포위하자 자살하였다.
정여립의 역모 계획
정여립이 자살한 천반산과 동굴
이 사건의 처리를 주도한 것은 鄭澈을 중심으로 한 西人이었으며, 東人의 영수인 이발(李潑)을 비롯하여 이호(李浩), 백유양 등이 정여립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는 등 동인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이를 기축옥사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전라도는 반역향(叛逆鄕)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 호남인물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정여립에 대하여는 어릴 때부터 성질이 포악하고 잔인하였으며, " 목자망존읍흥(木者亡尊邑興) .. 이씨는 망하고 정씨는 흥한다 "는 정감록流의 설을 퍼뜨려 왕조를 전복시키려 한 인물로 평가되어 왔었다.
반면에 " 천하공물설 (天下公物說) ..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 "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왕권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반면에 그가 대동계를 조직하여 무력을 기른 것은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에 호응하였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고, 이런 이유로 정여립은 西人과 東人 사이에 벌어진 당쟁의 희생자로서 그가 주도했다는 역모(逆謀)는 조작되었다는 견해가 요즘에 유력하다.
묘의 이장 (移葬)
송강 정철은 1593년 그이 나이 53세에 강화도에서 불우하게 생을 마감한다. 이듬해 부모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고양시 신원리 선영에 묻혔다. 그러나 1665년 우암 송시열에 의하여 무무런 인연도 없는 충북 진천으로 이장되었다.
굳이 그 이유를 말하자면, 송강의 후손인 정양(鄭瀁)이 진천현감으로 있을 때 마침 이 곳을 지나던 宋時烈이 묘자리를 잡아 준 것이다. 고양의 송강의 묘자리가 물이 많아 나오는 바람에 門中의 고민거리라는 말을 듣고, 송시열이 후손과 상의하여 묘를 이장하고 사당인 정송강사(鄭松江祠)를 지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기축옥사 己丑獄事
1567년 宣祖의 즉위와 함께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정국을 장악한 士林세력은 1575년 이후 東人과 西人으로 나뉘고, 그동안 양쪽의 조화를 주장하던 이율곡이 西人이 되면서 西人이 정파로서의 틀을 잡게되는 1582년부터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전개되었다.
한때 정국의 우세를 장악했던 西人들은 이율곡이 죽은 뒤, 宣祖의 견제를 받으면서 위축되고, 東人이 권력의 핵심에 진출하여 장국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때 이율곡의 추천으로 벼슬에 올랐던 정여립(鄭汝立)은 이율곡이 죽은 후 그를 배신하였다하여 宣祖의 미움을 받고 그의 고향인전주로 쫒겨났다.
정여립은 전라도,황해도 일대의 세력과 결탁하여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謀逆을 꾀한다. 그는 天下는 공물(公物)이라는 전제 아래 혈통에 의한 왕위계승이 결코 절대성을 가질 수 없다고 하고, 주자학적인 불사이군론(不事二君論)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의 모역(謀逆)은 사전에 발각되었고, 이 때 정철(鄭澈) 등 서인세력은 사건을처리하면서 이를 정권장악의 기회로 삼아 東人을 제거하고자 옥사를 확대하였다. 정여립은 진안군 죽도로 도망했다가 자살하고, 아들 옥남(玉藍)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정여립의 친척인 정언신, 정언지 등과 정여립과 평소 친분이 깊었던 이발(李潑), 백유양(白惟讓), 이급(李汲) 등이 일당으로 몰려 심문 도중에 죽고, 이산해(李山海), 정인홍(鄭仁弘) 등 다수의 東人 핵심인물들이 관직에서 밀려났다. 특히 조식(조식)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은 역모의 또 다른 괴수로 지목되어 옥사하고, 서경덕의 제자인 정개청(鄭介淸)도 일당을 지목되었다가 배절의(排節義)라는 죄목으로 옥사하였다. 대부분 정여립과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전라도를 반역지향(叛逆之鄕)이러고 하여 그 지방 인재를 등용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약400만명이었는데, 이 옥사로 인하여 3년에 걸쳐 1,000여명이 처형되었는데, 이 옥사를 책임진 인물이 정철이었다. 이 결과 동인은 크게 위축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는데 西人의 지나친 세력확대는 宣祖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정철이 후계자문제를 거론하다가 밀려나면서 다시 東人이 정국을 주도한다.
이후 東人세력은 西人 처리에 대한 온건과 강경의 입장 차이로 이퇴계계열의 南人과 조식,서경덕 계열의 北人으로 나뉘는 조짐을 낳게 된다.
대쪽같은 원칙주의자
강원도 곳곳에는 그곳에서 1년간 관찰사를 지낸 정철과 관련된 설화들이 전한다. 그 중 하나가 강원도 양양군 상운리에 있는 누룩바위에 관한 이야기이다.
마을을 지키던 이 누룩바위를 정철이 두 동강을 냈는데 그 후로 마을이 못살게 됐다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정철에 관한 많은 설화들이전하는데, 대부분 그를 완고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정철이 宣祖로 부터 하사받은 옥잔(玉盞)과 은잔(銀盞)
사미인곡 思美人曲
평생을 술과 벗하다
원칙과 소신을 중시하며 타협을 거부했던 정철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평생을 벗 삼은 술이었다. 유성룡의 운암잡록(雲巖雜錄)에 의하면, 정철은 술 때문에 政敵들로부터 숱한 공격을 받았다. 정철이 술에 취해 일을 돌보지 않았다는 비난이었다.
충복 진천면에 위치한 정철의 종가에는 가보로 이어져 내려오는 귀한 물건이 있다. 宣祖가 정철에게 하사하였다는 옥잔(玉盞)과 은잔(銀盞)이다.
宣祖가 하사한 玉盞과 銀盞
정철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宣祖가 술잔을 하사하여, 그 盞에 한 잔씩만 따라 마시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은잔을 두고 東人들은 정철이 두드려 펴서 원래보다 크게 만들었다는 비난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마시려고 꾀를 부렸다는 것이다.
정철은 자신이 술을 못 끊는 이유를 당당히 밝히고, 늘 술을 마시며 살았다. 또 술에 취하면 위아래를 따지지 않고 사람들을 면전에서 심하게 꾸짖었다고 "선조수정실록"은 전하고 있다.
장진주사 將進酒辭
한 잔(盞)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곶 껏거(꺾어) 셈(算)하며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세그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회 거적 더퍼
주리혀(졸라) 매여가나, 화려한 상여에 流蘇寶帳의 만인이 울고가나
어욱새(억새), 속새, 덥가나무(떡갈나무),백양 수페(숲에) 가기만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굴근 눈, 쇼쇼리(슬슬히) 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할고
하물며 무덤 우희 잔마비 휘파람 불제
뉘우친달 엇더리(무엇하리)
홍만종은 순오지(순오지)에서 이 노래가 이태백이 장길(長吉)에게 술을 권하는 것을 모방하고, 두보(두보)의 詩를 취해서 지은 것이라고 하면서, " 뜻이 통달하고 글귀가 서글프게 되었으니 만일 옛날 孟嘗君이 이 가곡을 들었다면 雍門琴이 아니라도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라고 평하였다.
내용은 사람이 한번 죽으면 지게 위에 거적을 씌워 매어가나, 화려한 휘장에 감겨 萬人이 울면서 따라가나 무덤에 가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때 가서 뉘우친들 소용없으니 지금 실컷 술을 마시자는 것이다. 이태백,두보의 한시를 모방한것이라고는 하나 어욱새,속새,덥가나무,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쇼쇼리 바람 같은 순수한 우리말로써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해 새로운 詩의 세계를 창조하였다.애주가로 이름높고 호방한 성격을 지닌 정철의 체취가 잘 나타나면서 허무, 적막, 애수의 정조를 짙게 보여준다.
정철의 최후 .. 권력은 돌고 돌아
기축옥사(己丑獄事)... 3년간의 광란의 역사가 끝나자 宣祖는 변심한다. 정철이 宣祖에게 世子책봉의 문제를 건의한 것이 빌미를 제공하였다. 정철은 光海君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였으나, 선조는 다른 아들 신성군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은 이일을 빌미로 宣祖가 크게 노하여 정철을 미워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결국 정철은 파직되었고 유배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선조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것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 정철의 일을 말하면 입이 더러워질 듯하니, 방치하는 것이 옳다. 최영경의 원통함은 내가 감당하겠다.. 선조실록. 선조 27년8월9일
그리고 " 독한 정철때문에 나의 어진 신하들을 죽였구나 "라며 모든 죽음의 책임을 정철에게 뒤집어 씌웠다. 宣祖의 배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철을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고 유배지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쳐 움직이지 못하게 감금하였다.
말년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을 읽고 詩를 쓰는 것 밖에 없었다. " 송강유필(松江遺筆)"을 보면 그가 유배지에서 글을 읽은 횟수를 동그라미로 표시한 부분이 있다. 정철의 무기력한 말년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빼어난 시인이자 실패한 정치인의 초상을 보여준 정철은 빈곤 속에 신음하다가 56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송강집(松江集)"은 정철의 말년이 " 숯으로 바꾸어 먹고 소반에는 간장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번 틀어지면 다시는 화해할 줄 모르는 고집불통이자 타협을 모르는 윈칙주의자이었던 정철이 정치와는 무관한 시인으로 평생을 살았다면 어떠하였을까.. 예술적인 기질과 정치적인 성향 모두 날카로웠던 정철.. 그래서 세속적인 처세에는 어두웠던 탓일까
정철과 진옥(眞玉)의 사랑
정철은 56세 때에, 宣祖에게 光海君의 세자책봉을 건의하다 宣祖의 노여움을 사서 평안도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 그를 파직시켜 유배보내면서 宣祖는 정철을 향해 " 大臣으로서 酒色에 빠져 있으니, 나랏 일을 그르칠 수 밖에 없다 "고 노골적으로 꾸중하였다.
정철은 유배지 강계에서 스스로 삶을 되돌아 보니 나름대로 명리를 찾아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유배 당해 객지로 떠도는 자신의 신세가 비참하고 처량하여, 실의를 달래기 위해 날마다 술과 詩作으로 지냈다.
추일작 秋日作 ... 어느 가을에
산우야명죽 山雨夜鳴竹 산에 비내려 밤 새워 대숲을 울리고
초충추근상 草蟲秋近床 가을 풀벌레 소리, 밤에는 더욱 크게 울리네
유년나가주 流年那可駐 흐르는 세월 어찌 멈추랴
백발부금장 白髮不禁長 길어지는 흰머리 막을 수 없네.
잠 못드는 가을 밤, 온갖 생각으로 뒤척일 그 때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철은 누운채로 대답하니, 문이 열리고 소리없이 들어서는 여인..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의 방문에 정철은 놀랐지만, 그가 더욱 놀란 것은 장옷을 벗으니 들어나는 화용월태(花容月態 .. 꽃 같은 얼굴과 달 같은 자태)의 미모이었다.
진옥이 말하기를 .. " 賤妓, 眞玉이라 하옵고 일찍부터 대감의 명성을 들었사오며, 더욱이 대감의 글을 흠모해 왔습니다 ". 정철이 다급히 묻는다. " 그래? 내 글을 읽었다니 무엇을 읽었는고?" 하니, 진옥이 "제가 거문고를 타 올릴까요 ? "하고는 읊기를.......
거세부지세 居世不知世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모르겠고
대천난견천 戴天難見天 하늘 아래 살면서도 하늘 보기 어렵구나
지심유백발 知心唯白髮 내 마음을 아는 것은 오직 백발 너 뿐인데
수아우경년 隨我又經年 나를 따라 또 한 해 세월 넘는구나.
외롭고 쓸쓸한 귀양살이와 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하는 정철의 마음을 꿰뚤어 보는 詩였다. 眞玉을 만난 이후로 정철은 그녀의 샘솟는 기지와 해학, 鶴이 나는듯한 가야금의 선율 속에 어지러운 마음을 달래고 우울함을 잊을 수 있었다. 날이 갈수록 두사람의 사랑은 익어갔고, 드디어 정철은 그녀를 품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조선의 풍류를 아는 대문호답게 그는 그녀에게 연애시 한구절을 날린다. (權花樂府에 나오는 鄭松江 與眞玉相酬答..이란 詩이다)
옥이 옥이라커늘 반옥(반玉)만 너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적실(的實)하다.
내게 살송곳 잇던니 뚜러 볼가 하노라
송강 정철(鄭澈)의 노래가 끝나자 가야금을 뜯던 진옥(眞玉)은 기다렸다는 듯이 응수하기를......
철(鐵)이 철(鐵)이라커늘 섭철(攝鐵)만 녀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잇던니 뇌겨 볼가 하노라.
鄭鐵은 깜짝 놀랐다. 그녀의 즉석 和唱은 조선 제일의 시인 정철을 완전히 탄복시켰던 것이다. 정철의 시조에 字字句句, 對句형식으로 서슴없이 불러대는 眞玉은 정녕 뛰어난 시인이었다. 두 사람의 은유적 표현 역시 뛰어나다.
"반옥"은 진짜 옥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人造玉이고, 살송곳은 육(肉)송곳으로 남자의 성기를 은유하고 있는데, 眞玉은 그 뜻을 쉽게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한 술 더 뜬다. "반玉"에 대하여는 섭철(섭鐵), 眞玉에 대하여는 정철(正鐵), 살송곳에 대하여는 "골풀무"의 對句는 놀라운 기지와 재치와 해학이다. 섭철은 잡것이 섞인 순수하지 못한 쇠를 말하고, 정철은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철이며, "골풀무"는 불을 피우는데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인데, 남자의 성기를 녹여내는 여자의 성기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기생 진옥은 시조집 "권화악부(權花樂府)"에 송강첩(松江妾)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시조 문헌 중에 "누구의 妾"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녀가 유일하다. 眞玉도 妓女임에 틀림없는데, 松江妾이라고 기록된 것은 송강 정철의 지위와 명성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사회제도 속에서 양반의 축첩은 조금도 허물이 아니었는데, 이런 기록이 더많이 있을 수 있으련만 유독 松江妾이라는 기록은 眞玉에게서만 보인다.
그 누가 이들의 노래를 추잡한 시정잡배들이 오입질하기 위하여 妓生을 유혹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는가? 평소 흠모하던 대 문장가인 정철을 향한 여인의 육체와 정신이 합일을 이루는 행위는 숭고한 사랑행위 그 자체이었을 것이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그 해 5월 오랜 유배생활에서 풀려 다시 벼슬길에 나가게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松江을 보내는 자리에서 眞玉은 이렇게 표현하여 노래를 불렀다.
인간차야이정다 人間此夜離情多 오늘 밤도 이별하는 사람이 많겠지요
낙월창망입원파 落月蒼茫入遠波 슬프다. 밝은 달 빛만 물 위에 지네.
석간금초하처백 惜間今硝何處佰 애닯다. 이 밤을 그대는 어디서 자렵니까?
여창공청운홍과 旅窓空廳雲鴻過 나그네 창가에는 외로운 기러기 울음뿐이네
부인 유씨는 한양으로 올라온 정철더러 眞玉을 데려 오도록 권하였다. 鄭澈 역시 眞玉에게 그 뜻을 물었으나, 그녀는 끝내 거절하였고 江界에서 혼자 살며 짧은 동안의 정철과의 인연을 생각하며 지냈다고 한다.
정철과 강아(江娥)의 사랑
송강이 전라도관찰사로 재임 시, 그곳의 동기(童妓)이었던 자미(紫薇)가 있었다. 송강이 그녀를 몹시 사랑하자 세상 사람들이 松江의 江자를 따서 강아(江娥)라 불렀다. 송강은 1582년 9월 도승지로 임명되어 떠나면서 江娥에게 이 석별의 詩를 지어주고 한양으로 떠났다.
일원춘색자미화 一園春色紫薇花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피어
재간가인승옥채 縡看佳人勝玉釵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막향장안루상망 莫向長安樓上望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만가쟁시연방화 滿街爭是戀芳華 거리의 사람들 모두 네 모습 사랑하여 다투리
자미화(紫薇花)는 무려 100일 동안이나 꽃이 핀다는 배롱나무 즉, 목백일홍이다. 송강의 눈에는 강아(江娥)가 그런 미인으로 보였을 것이고, 이별 후에도 뭇 사내의 눈길이 그녀에게 머물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 후 강아는 송강에 대한 연모의 정이 깊어 평안도 江界로 귀양가 위리안치 중인 송강을 찾았으나, 당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송강은 이미 宣祖의 명을 받아 유배에서 풀려 전라,충청도 지방의 도제찰사로 임명되어 만날 수 없었다.
강아는 다시 송강을 만나기 위하여 홀홀단신으로 적진을 뚫고 남하하다가 倭軍에게 잡히자, 의병장 이량의 권유로 자기 몸을 던져 조국의 제단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적장 小西行長을 유혹, 아군에게 첩보를 제공하여 결국 전세를 역전시켜 평양 탈환의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강아는 소심(素心)이라는 여승이 되어 지금의 고양군 원당에 있던 송강의 묘소를 찾아 한평생을 마감하였다. 문중에서는 지금도 강아의 묘에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지금의 원당 근처 송강마을에 있다. 그러나 이 곳에 있던 정철의 묘는 송시열의 주선으로 충북 진천으로 옮겨 죽어서도 송강과 강아는 함깨 있지를 못하게 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원당, 송강마을에 있는 江娥의 묘
속미인곡 續美人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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