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해설

[스크랩] 빛고을 어머니 같은 절, 무등산 증심사

산술 2016. 1. 15. 12:43

 

광주사람들에게 무등산 증심사란 무엇일까?

무등산이 어머니 치맛자락처럼 포근한 산이라면 증심사는 그 어머니 품에 안긴 귀염둥이 막내딸 정도 될까?

연간 탐방객 300만명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무등산은 지금은 도립공원이지만 올해 12월에 국립공원 지정이 결정되는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다.

무등산이 국립공원이 된다면 증심사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

무등산에는 증심사, 원효사, 약사사, 규봉암, 문빈정사가 있으며 무등산을 아우르는 광주 동구, 북구, 화순, 담양 등지에 산재된

사찰과 암자만도 100여개에 다다른다고 한다. 과히 광주불교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무등산.

지금도 북한산국립공원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연간 탐방객이 찾지만 무등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다면 아마도 북한산을 추월하여

대한민국에서 제일로 많은 탐방객들이 찾는 산이 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증심사에도 엄청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할 것이다.

 

 

 

 

무등산의 모든 길은 증심사로 통한다?

아마도 무등산 곳곳의 이정표에 증심사란 단어를 빼기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증심사는 무등산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어 버렸다.

 

 

 

증심사로 올라가는 길에 언제부터 인지 쓰러진 나무가 다리가 되어 주고 있다.

치울까? 말까...살아생전엔 늘 푸르름으로 생명의 공기를 주더니 이제는 생을 마쳐 통나무 다리가 되어준 고마운 나무...

 

 

 

                일주문을 지나며 수북히 쌓인 낙엽진 계단길을 사색을 걸어본다.

 

 

 

증심사 부도전은 일주문을 지나면 바로 왼쪽 언덕에 있다.

3기의 부도와 17기의 공덕비가 있는 것이 증심사 중수에 공덕이 많은 신도들이 있었다는 이야기 일까?

증심사 곳곳에 산재해 있던 비석들을 모두 이곳으로 모아놓았다고 한다.

 

 

 

아내와 함께 찾은 무등산 증심사는 가을비가 가져다 준 환상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증심사 사천왕문은 최근 복원되었다.

1200년의 역사를 가진 증심사는 1609년에 중창한 정문누각 취백루1층에 사천왕을 모시고 있었지만

6.25때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2012년 2월 24일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광목천왕, 다문천왕, 지국천왕, 증장천왕

 

 

 

증심사 취백루는 정유재란때 불타버린 것을 1609년(광해군1)에 중수하면서 세운 정문누각이었다.

 

 

 

증심사 바로 옆으로는 무등산에서 발원된 물이 계곡을 만들고

증심사천을 따라 광주천으로 흘러들어간다.

 

 

 

 

 

 

취백루 1층은 종무소로 2층은 강당으로 사용한다.

사찰의 당우로 쓰이는 이름치고는 상당히 시적인 취백루는 취백홍도(翠栢紅桃)가 피어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시로 쓴 고려 명종때의 시인 김극기의 시귀에서 딴 것이라고 하지만 그 이름만큼 바깥에서 본 취백루의 모습은

증심사를 대표하는 멋이 있다.

 

 

 

증심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통일신라시대에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이

개창(開創)하고, 1094년(고려 선종 11)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했다고 전한다.
1443년(조선 세종 25)에 김방(金倣)이 다시 중수했지만,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석경(釋經)·수장(修裝)·도광(道光)의 3대 선사가 4창(四創)했다고 한다.

그 후 신도들의 정성으로 몇 차례 보수가 이루어졌으나, 6 ·25전쟁 때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다가 1970년에야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복구되었다고 한다. 개창연대로 보며 증심사의 역사도 무려 12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천년고찰인 것이다.

 

 

 

적묵당은 선방으로 쓰인다고...

 

 

 

행원당은 청향녹다, 화안애어라는 글자가 기둥에 걸려있어 요사채와 차를 마시는 곳인 듯...

 

 

 

대웅전의 부처님은 보지 못했다.

비가 내리고 날씨가 쌀쌀해서 부처님 감기 걸리실까봐 문을 안 열어 놓은 듯...

 

 

 

대웅전은 상당히 화려한 모습이다.

네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법당안에는 삼존불을 봉안했는대

석가모니를 주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협시불로 봉안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을 나와 오백전으로 가는 스님을 뒤 따라 가 보았다.

 

 

 

대웅전 바로 뒤에는 오백전을 중앙에 두고 우측으로 지장전이, 좌측으로는 비로전이 있어,

오백전의 중요성을 알리고 있다.

고창 문수사의 문수전이 대웅전 바로 뒤편에 위치한 것과 같은 뜻일 것이다.

그런데 지장전에는 회심각이란 편액이 하나 더 걸려있어 고창 문수사의 금륜전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의 건물에 금륜전, 산식각, 응향각 편액을 걸어놓고 출입문 세개에 모시는 탱화도 다 틀린 문수사.

 

 

 

비로전에는 보물 제131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장흥보림사의 철조비로자나불(국보117호), 철원 도피안사의 철조비로자나불(국보63호)과 함께 통일신라후기인

9세기경에 조성된 대표적인 철불이라고 한다.

신체의 비례가 인체와 비슷한 등신불로 1934년 광주에 있던 대황사라는 폐사터에서 옮겨왔다고도 하고, 계냇게 절에서

옮겨왔다고도 한다.

 

 

 

오백전

 

 

 

오백전은 증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443년(세종25)에 전라감사 김방이 오백전을 건립하고 오백나한과 10대 제자의 성상을 봉안하였는데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것을 광해군때 중수하였다고 한다.

6.25때 증심사의 모든 건물이 불탔음에도 오백전만큼은 무사했다고 하니 아마도 무등산 지역의 사찰 중 유일한

조선시대 건물이지 않나 싶다.

 

 

                           오백전 내부 (위 사진은 증심사 홈페이지에 퍼옴)

                           오백전에는 석가모니불과 10대제자, 16나한, 500나한을 모시고 있다 한다.

 

 

오백전 뒤의 산신각..

 

 

 

증심사 오층석탑과 칠층석탑

오층석탑은 고려시대로 추정되고 칠층석탑은 조선시대 중기로 추정된다고 ....

통일신라시대때 창건되고 고려시대때 중수되었으며 조선시대때 다시 중수되었으니

탑들의 모양이 많이 틀린 모습에서 시대를 달리하며 1200년의 역사를 이어온 증심사의 내력을 볼 수 있다.

 

 

                증심사 삼층석탑은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등록되어 있다.

                1971년 해체복원당시 탑안에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니 이미 그 전에 도굴된 듯.

 

 

 

원통전은 석조보살입상을 보존하기위해 세웠다.

고려시대 석불로 담양군 남면 정곡리 서봉사지에 있던 것을 1966년 현준호라는 사람이 사재를 들여

증심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광주시 유형문화재 제14호인 석조보살입상

 

 

 

 

범종각

 

 

 

적묵당 담장에 걸린 가을과...

 

 

 

취벽루 담장을 넘어가는 가을...

 

 

 

 

사천왕문을 나서는 가을...

 

 

 

                감로수에 쌓인 가을...

 

 

 

 

바위위에 쌓인 가을에서

이제 겨울이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빛고을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한 무등산의 대표적인 사찰 증심사.

증심사의 가을은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글 : 포토뉴스 코리아 simpro) 트위터 ☞ http://twitter.com/huhasim

   지도:4]

            

 

출처 : simpro의 반 백년 이야기
글쓴이 : simpro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