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사랑환경대학 교재 요점정리]
무돌길이란?
무등산은 약1억 년 전에 화산폭발에 의해 태어난 빛고을광주를 상징하는 정신적인 영산이다.
무등산 정신으로 이어진 무등 정신은 5.18민주항쟁, 4.19민주화운동, 항일독립학생운동, 동학민중운동, 임진왜란의병활동 등 우리나라 역사 속에 무등 정신이 있었다.
무등 정신이 무등 사상이며 무등산자락에 우리선조들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가 있는 재를 넘어 마을과 마을을 잇는 무돌 길에 묻혀있다.
100년에서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무돌 길은 전체 15개길 로 총 51.8km 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짐을 소달구지나 지게에 싣거나 등에 이고지고 걸어서 재를 넘나들던 생활문화 소통의 길이다.
담양의 영산강 수계와 화순 쪽 섬진강 수계의 표고 차 때문에 담양에서 화순으로 가는 길이 좀 더 가파른 고갯길이 된다.
흔희 무등산의 가치를 탐방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무등산의 가치 중 조망가치가 70%이고 탐방가치는 30%라고 한다.
무돌 길을 통하여 무등산의 조망가치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으며 도시문화와 농촌문화 그리고 전통역사문화 사시사철 변화무쌍한 경관의 다양성은 무등산자락의 품안에서 산사랑 운동으로 무돌 길을 더 다듬어간다면 앞으로 세계적인 명품길이 될 것이다.
무돌길 개척목적, 특징, 효과, 등산로
1. 무돌길 개척목적
무돌 길은 무등산정상중심탐방등산객의 인구분산무등산을 보다 넓고 쾌적한 공간 활용무등산의 자연문화가치보존무등산의 조망가치 증대무등산자락 자연생태 역사유적인물 전통문화 발굴
2. 무돌길 특징
수직적 등산길이 아닌 수평적 유산소길1920년 제작 지도를 바탕으로 최소 100년에서 500년 이상의길무등산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보는 길무등산자락 전통마을과 재를 넘어 다니던 조상들의 생활소통의길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는 전통생태 문화의길무돌길 탐방진출입 교통이용이하며 마음대로 길 선택이 기능
3. 무돌 길의 효과
과부하정상중심 등산인구 분산유도효과무돌 길 경유 마을주변경제 효과조망 점에 따라 무등산의 다양한 경관제공가족단위 여가활동 공간의 제공무등산자락 전통마을의 자연생태, 역사, 문화, 유적 심미체험
4. 무돌길 등산로
동구방향 증심계곡, 지산유원지, 2수원지 용추계곡, 동적계곡북구방향 산장원효계곡, 금곡원효계곡, 각화저수지담양방향 정곡리, 절골, 무동저수지화순방향 영평 이서초, 수만리계곡, 안양산휴양림
무돌길 1길 (싸리길)
코 스 : 각화마을(시화) - 각화저수지 - 들 산재 - 신촌마을 - 등촌 마을 4km
대중교통 : 두암81, 용전86, 금호36, 금남55, 송암74, 석곡87
주변안내 : 각화(시화)마을, 들 산재(들 싸릿재), 제4수원지
싸리바구니, 싸리비 생활용품 각화마을
500년 이상 우마차 넘어 다닌 생활의 길 들산재
수원지로 사용되던 무등산공원명소 4수원지
각화중학교에서 출발하면 왼쪽에 300당산나무가 있고 전통주택 담벼락에는 시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각화(시화)마을 입구에 위치한 홍보관은 개인소유로서, 누구나입장이가능하며 관람객에게 마을을 소개하는 영상시설을 갖추고 약 한 시간 정도 설명해주고 있다.
각화마을은 사람들이 싸리를 채취하여 싸리바구니, 싸리비 등 생활용품을 만들어 시장에 팔아 생활경제수단으로 싸리생활용품마을로 유명하다.
들 산재는 각화동에서 청풍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싸리를 채취하여 넘어 다니던 길로서 500년 이상 넘어 다녔던 생활의 길로 당시 우마차가 다녔다고 한다.
들 산재 부근에서 먼 산을 처다 보면 무등산정상 삼봉인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이 우뚝 솟아 보이며, 그 앞에 중봉, 원효봉, 누에봉 등이 하늘아래 장엄하게 보인다.
고개를 넘어서면 들과, 산과, 마을, 사람들이 공존하는 전형적인 한국들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을부근에 다다를 쯤에 무형문화재 제18호 가야금병창 소유자 성전(문명자)국악전시관을 지나게 된다.
신촌마을의 유물. 유적으로 등촌재, 균산정, 괴양정, 서석단 등이 있으며 신촌마을 입석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이 마을 당산나무와 함께 위치해 있다.
- 각화마을
각화마을은 원래 광주군 두 방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삼각산아래 동내라고해서 또는 삼각산에서 뻗어 내린 사슴뿔처럼 생긴 형국이라 하여 각화라 하였다. (시화)마을의 공식명칭은 각화동에 있는 “시화문화마을”이다. 한마디로 책과 화실에 있을 시와 그림이 동네방네 벽에 예쁘게 장식되어 있는데 2002년 지역주민자치위원회에서 정감 있는 곡목 길을 만들기 위해 31세대 담장에 시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지금은 서울의 인사동이나 순창의 한옥마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 제4수원지
청옥동 잣고개 너머에 있는 제4수원지는 일명 석곡수원지라고도 한다. 1962년 8월에 착공하여 5년간의 공사 끝에 1967년 완공되었다. 이수원지는 해방 전부터 계획되었는데 한국전쟁 등으로 공사가 미루어지다가 5.16 군사혁명 이후로 비로소 완공되었다. 화암 마을로 흘러내리는 물을 받는 수원지로 등촌 마을과 신촌마을 양쪽산허리를 이어 둑을 쌓은 것이다. 저수량은 148만 톤이며 정수장은 각화마을에 있다. 이제는 동복저수지의 완공으로 문화동 각화동 일대의 급수기능에 그쳐 수원지로서는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으며 오히려 무등산공원의 명소로서 그 기능이 더 중시되고 있다.
무돌길 2길 (조릿대길)
코 스 : 등촌(청풍)마을 - 지릿재(조릿대재) - 배재마을정자 3km
대중교통 : 찾아가기 석곡87, 돌아오기 충효187, 충효1187
주변안내 : 등촌마을 입석, 청풍학생야영장
아담하고 아름다운돌담이 정겨운 복조리마을
고려시대때 만들어진 조릿대를 운반하던 지릿재
달빛에 배꽃이 떨어진 것처럼 희다는 백토재
등촌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아담하고 아름다운돌담이 정겹게 느껴진다. 옛날사람들은 돌담너머 인사도 나누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담 너머로 전달도 하고 처녀총각이 만나는 소통의 벽이기도 했으리라.
덕봉산과 마주보고 있어 울창한 숲과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아름다운경관 등이 휴양지로서 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예로부터 복조리를 만들어 소득을 올리는 복조리 마을로도 유명하다.
지릿재는 예전에 조릿대를 운반하는 길로 고려시대 때 만들어졌으며 지적도에도 폭6m로 되어있는데 사람들의 왕래가 뜸해지고 땅이 귀하던 시절 밭을 일구던 주민들이 길 쪽까지 밭으로 넣어 농사를 짓다보니 길의 폭이 약 1.5m정도로 지금은 협소한듯하나 옛날에는 우마차가 다녔다 한다. 숲이 우거져 여름에도 걷는데 좋고 산이 완만하여 관절이 안 좋은 노인들이 산책하기에 적합하다.
지릿재를 넘어서면 충장사가 있는 배재마을이다. 배재마을은 옛날에는 이치마을이라 했는데 현재는 우리말로 바꾸어 배재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백토재 라고도 부르는데 백자도요지로 고령토를 쌓아둔 재가 달빛에 배꽃이 떨어진 것처럼 희다고 해서 또는 이치라고 불렀다 한다.
- 등촌 마을 입석
등촌 마을 입구에 선사시대 2기의 입석이 세워져있다. 6.25 이전까지는 동내에서 당산재를 지내고 난 후 이 입석에서 줄을 감았다고 한다. 정사각형의 정교한 형태이며 석재는 화강암이다. 입석중간에 채흔이 조식되어있으며 크기는 높이 150cm, 폭 27cm, 두께 27cm이다. 이 두 개의 입석사이에 널따란 돌다리가 있었는데 이 다리를 “똑 다리께“ 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을의 도로공사로 돌다리도 없어지고 입석도 원래자리에 있지 않다. 마을사람들은 이 입석을 ”망부석 부부“라 하여 이 돌이 마을을 지켜준다 믿고 있다.
- 청풍학생 야영장
1997년6월19일에 문을 연 청풍학생야영장은 강당, 사무실, 취사장, 세면장, 양호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모험시설로는 복합장벽 오르기, 그물통과, 타이어통과, 외줄 오르기, 건너기, 그물타기, 통나무 로프건너기, 흔들 계간 오르기, 통나무 뗏목타기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잇도록 구성되어있다. 주변에 있는 망월동 5.18민주 성지를 비롯하여 환벽당, 식영정, 소쇄원을 포함하는 가사문화권이 있어 연계학습장으로 활용하기 적합하다.
무돌길 3길-1 (덕령길)
코 스 : 배재마을(충장사) - 금정이주촌 - 덕령골숲길 - 금곡마을정자 2km
대중교통 : 찾아가기 충효187, 충효1187
주변안내 : 배재마을, 충장사, 시가문화권정자(취가정, 풍암정, 환벽당), 충효동 도요지, 무등산수박
충장공의 곧은 절개와 충성을 나타내는 듯한 소나무
금곡동 원효사 부근 무등산복원사업 금정이주촌
시집살이를 토로하며 방망이로 마음을 달래던 빨래터
배재마을(충장사)에서 3길이 시작된다. 산길을 지나고 마을을 지나 다시 산과 밭을 접하는 사이길을 지나게 되는데 배재마을에서 금곡마을을 오갔던 옛길의 흔적이 온전히 남아있고 경사가 완만하여 걷기에 적당하다. 덕령길은 충장공 김덕령의병장의 생가와 사우 충장사 이동경로 이기도 하다. 이곳 덕령길은 충장공의 곧은 절개와 충성을 나타내는 듯 소나무가 많이 있는데 우리역사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성삼문의 시중에 “이 몸이 죽고 죽어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삼상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때 독야청청하리라” 라고 했던 것도 선비의 곧은 절개와 충성심에 비유했던 것이다.
금정이주촌은 지난 1998년 광주시가 무등산복원사업의 하나로 금곡동 원효사 부근 거주민 주택 22동을 철거하고 충장사부근 배재마을 로 이주시키면서 불려진 이름이다.
덕령길을 지나 마을 앞에 다다르면 동내 앞 조그만 하천에 빨래터가 그대로 보존되어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빨래터에 나와 시어머니한태 시집살이를 토로하며 방망이로 마음을 달래고, 자식들의 자랑을 늘어놓았던 곳인데 지금도 사용하는지 최근에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
금곡마을 정자에서 바라본 무등산 삼봉이 아름답다. 무등산일대에는 성산별곡의 별뫼와 식영정의 사선이라 불리우는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 등의 충신들이 나라 일을 걱정하고 풍류를 읊던 시가의산실인 식영정과 부용당, 고려 말 충신 전신민의 독수정, 김윤재의 환벽당, 그 뒷등의 취가정, 원효계곡의 절경속에 자리한 풍암정 등 정각과 정원이 집중된 곳으로 헤아릴 수 없는 소중한 유적들을 간직하고 있다.
무돌길 3길-2 (충장사, 충효동도요지, 무등산수박)
- 충장사
충장사는 임진왜란 때 충장공 김덕령(1568~1596)의병장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는 사당, 제실, 유물관, 그리고 장군의 묘역으로 이루어진 사우이다. 지금의 사우는 장군의 애국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1975년2월 건립되었으며 특히 장군의 묘를 현재의 장소로 이전할 때 발굴된 의복 8점이 국가 중요민속자료 11호로 지정되어 유물관에 보존되어있다. 사우배치를 보면 본당인 충장사와 내삼문, 외삼문, 동재, 서재, 은륜비각, 유물관, 연못을 비롯한 조경시설인데 모두가 전통 한국고유의 건축양식과 정감을 살려서 장엄한 경관을 갖추었다.
- 충효동도요지(15~16세기, 분청사기 사적 제 141호)
무돌길 3길 종점 금곡마을 정자에서 무등산 북쪽 능선자락에 위치한다.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충효동도요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모이는 기록이 남아 1963년, 1991년 발굴공사로 여러 가지 가마유구와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깊이 3.5m에 이르는 퇴적구의 층위조사를 통해 분청사기의 변화와 분청에서 백자로 변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효동 도요지의 제작활동 시기는 15세기 전반에서 말까지로 추정된다. 현재 금곡동에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전시하고 문화해설사로부터 설명을 들을 수 있다.
- 무등산수박
13세기경 고려인홍다구가 몽고에서 종자를 가져와 임진왜란을 전후해 무등산일대에서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시대 광주지역의 유일한 진상품이 된 무등산수박은 최근 수박성분 중 일부가 항암치료 효과를 내고 있다 는 연구발표가 되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강한광선과 온도가 높고 햇볕쪼이는 시간이 긴데다 사질 양토로 배수가 양호하여 북향으로 지력이 좋은 곳이 무등산 수박의 절대적인 재배조건이다. 이 같은 조건을 갖춘 곳은 무등산 중에서도 서북쪽에 위치한 광주시 북구 충효동과 청옥동 일대 뿐이다.
무돌길 3길-3 (취가정, 풍암정, 환벽당)
-취가정(충효동 1800년)
광주호 인근 산중턱에 소재하고 있어 환벽당, 식영정, 소쇄원, 등과 어울려 옛스런 정취를 자아낸다. 규모는 정면1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고 1950년 불타버린 것을 김만식의 후손 김희준과 문족들이 1955년 복원하였다. 취가정은 김덕령의 혼을 위로하고 그를 기리고자 후손인 김만식과 집안사람들이 1890년에 김덕령이 태어나고 자란이곳에 세운 것으로 정자의 이름은 권필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노래를 부르자 권필이 시를 지어 달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다. 즉 김덕령장군이 술에 취하여 꿈속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으로 취가정이라고 지은 것이다. 송근수의 기, 김옥문의 중건기, 김만식의 상량문, 및 석주 권필과 충장공의 시가 있다.
- 풍암정(16세기, 문화재 자료 15호)
무등산 원효계곡 아래쪽에 있으며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시냇가 바위위에 걸터 있어 오른쪽의 풍암저수지와 왼쪽의 무등산마루와 함께 절경을 이룬다. 김덕보가 임진왜란 때 이병으로 활동하던 맏형 덕보가 사망하고 의병장으로 많은 공을 세운 중형 김덕령마저 무고하게 옥사하자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은둔생활을 한곳이다. 김덕보의 자는 자룡, 호는 풍암으로 김덕령의 아우이다. 건물은 정면 두칸, 측면 두칸의 한식기와 팔작지붕 건물로 임억령, 고경명, 안병준 시문 등이 걸려있다.
- 환벽당 (1536년경, 지방기념물 1호)
광주호의 상류 증암천의 언덕위에 높다랗게 자리 잡고 있다. 규모는 정면3칸, 측면2칸, 골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창건한 김윤재(1501-1572)는 자는 공로, 호는 사촌이며 충효리에서 태어났다. 중종때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교리를 거쳐 나주목사로 있다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인 충효리로 돌아왔다. 송강정철이 27세로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공부했던 곳으로 더 유명해져 송강정, 식영정과 함께 정송강 유적으로 불린다. 정자아래에는 김윤재와 정철의 아름다운 만남에 전설이 서린 조대와 용소가 있다.
무돌길 4길 (원효계곡길)
코 스 : 금곡마을-원효계곡 길-평촌마을-동림마을-우성마을-반석마을-연천리 3km
대중교통 : 찾아가기 충효 187번, 118번, 담양225번
주변안내 : 평촌도예공방, 리움웨딩스튜디오, 명가은찻집
오솔길을 따라 걸으면 눈앞에 펼쳐진 풍요로운 들판
증암천 따라 200m 하천바닥에 석반이 깔려있는 반석마을
자연스럽게 가꾸어진 고가에서 아기자기한 옛 정취와 그윽한 다향
제4길은 경사가 없는 평탄한길로 강따라 마을도로와 논길과 숲길로 구성되어있다. 제4길의 백미인 원효계곡숲길은 오솔길을 따라 숲향기를 맡고 걸으면서 눈앞에 펼쳐진 풍요로운 들판과 멀리 산 능선들을 조망할 수 있어 명품길이다. 산길을 나와 증암천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반석천 물소리를 듣고, 전원의 아름다운 풍광을 느끼며 걷노라면 시가 절로 나오는 길이다.
금곡마을 유래는 주검동유적에서 쇠가 났다고 하여 쇠골마을이라고도 하며 서른, 서림, 금곡, 서촌이라고 불린다. 농촌체험마을로 선정된 곳이며 무등산수박을 직접 재배하여 직거래로 판매하는 집하장이 있다.
충효동은 무등산북쪽자락에 안겨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형이 성안처럼 되어있는 “성안“ 또는 ”성내“ 마을로 불리다가 조선 정조때 김덕령장군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 하여 충효리라는 이름이 하사되었다.
담안마을 뒤쪽으로 큰 평야가 자리 잡고 있어 이지역이 부촌으로 원효계곡을 중신으로 누정문화(사림문화)를 이루는 사대부들을 배출하였다.
정자나무와 평촌교를 지나면 동림마을로 향한다. 담안 마을에는 리움 웨딩스튜디오가 그림처럼 자리하고 아트죤 담안에서 천연염색체험장 토우가 있어 마을의신선함과 예술성을 더해준다 . 평촌마을은 건강장수마을로 지정되어 농촌 마을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서 농촌체험과 지역에서 생산되는 채소류 등을 먹을거리도 함께 구매할 수 있고 손 두부와 장맛은 고향의 참맛을 느끼게 해 준다.
동림 마을을 지나 증암천을 따라 약 500m을 걸으면 마을 앞 하천바닥에 길이 200m에 폭 40m가량의 석반이 깔려있는 것이 유래되어 반석마을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고목이 다된 덩치 큰 왕 버들나무는 몸통만 남기고 서서 고풍스러움을 자아낸다. 아담한 마을길로 들어서면 전통찻집 “명가은“이 있다. 정겨운 담장너머로 소담하고 자연스럽게 가꾸어진 고가에서 아기자기한 옛 정취와 그윽한 다향을 느낄 수 있다.
무돌길 5길-1 (독수정길)
코 스 : 산음마을(독수정) - 함충이재 - 정곡마을 - 절골 - 경상마을정자 4km
대중교통 : 찾아가기 담양225번(첫차 6시40 ~ 막차 21시) 1시간 간격
주변안내 : 독수정, 서봉사터, 함충이재, 정곡리 700년 된 노거수
호남사림의 문화 활동의 성격과는 다른 독수정원림
밭으로 변해버린 절터에는 몇 개의 주춧돌만 서봉사를 대신해
천년의 신목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우뚝서있다.
5길은 산음교에서 시작한다. 산그늘이란 산음마을은 본래 제비네 또는 연천이라 하였다 한다. 산음마을 독수정길은 연천리 함충이재(가마재)를 넘어 정곡리로 가는 산길이다. 산음교를 지나면 광주호 주면에 밀집해 있는 16세기경 호남사림의 문화 활동의 성격과는 다른 독수정원림 (전라남도기념물 61호)이 있다.
독수정원림에서 북향으로 문이 난 독수정 마루에 앉아 다리쉼을 하고 몇 가구 되지 않은 아담한 산음동을 가로질러 정곡마을로 가는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오른편에 서은 전신민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잠시 고려충신의 망국의 한에 잠겨본다. 함충이재 (가마재)로 오르는 길 중간 산중에 애기무덤인 논바우가 있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약초재배를 하고 있어 산중으로 함부로 들어 갈수가 없다. 함충이재는 마치 삼림욕을 즐기는 것과 같다. 그동안 걸었던 길에 비해서는 조금 경사가 있지만 자갈로 길이 정비돼 있고 마른소나무 잎들이 수북이 쌓여 폭신폭신한 양탄자를 걷는 느낌이다.
함충이재를 20분가량 걸어서 도착한 마을이 정곡마을이다. 무등산줄기를 드리운 채 들어선 정곡마을은 늠름하게 가지를 드리운 고목과 골목마다 줄 을선 돌담이 마을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마을좌측 개울을 따라 서봉사가 있다는 절골이 있는 골짜기로 한참가면 감나무 밭으로 변해버린 절터에는 몇 개의 주춧돌만 서봉사를 대신해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
노거수가 있는 환암마을은 오늘날 차밭으로 바뀌었다. 차밭 옆에 천년의 신목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우뚝서있다. 이 나무는 마을의 당산나무로 지금도해마다 정월15일이면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1992년 3월9일 전남기념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둘레 11m, 수관이 40m에 이르는 노거수이지만 아주 건강하고 위풍당당하여 무돌길을 찾는 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경상마을에서 백남정재로 가는 길에 큰 호수 같은 경상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는 1962년 12월31일에 준공되었으며 시멘트 포장 윗길 다리부근에 매화 밭 농장과 옥녀탕이 있어 무릉도원의 봄에 아담한 풍광과 함께 한여름이면 시원함을 더해준다.
일제강점기 때 근처 산 금굴 에서 사금토를 채취하여 이곳에서 물로 침전시킨 작업을 하면서 파놓은 웅덩이 흔적들이 지금도 있다.
무돌길 5길-2 (독수정, 서봉사터, 함충이재)
- 독수정
고려 공민왕때 북도안무사 겸 병부상서를 지낸 서은 전신민이 기거한 곳으로, 전신민은 조선이 들어서자 서울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송도가 있는 북쪽을 향해 움막을 짓고 숨어살았다. 태조이성계가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두 나라와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아침마다 조복을 입고 송도를 향해 곡을 하며 절을 했다는 곳이다. 후손들에 의해 정자가 복원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독수정 이라는 이름은 중국 이백의 시구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홀로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죽었네” 에서 따온 말이다. 독수정원림은 소나무로 둘러져 있어 절의가 느껴지고, 구릉과 길섶에 핀 원추리와 배롱나무는 충신 전신민의 넋을 달래준다.
- 서봉사 터
조선세종 때 전라도지역을 선. 교 양종으로 정리하고, 교종사찰은 창평서봉사, 선종사찰은 구례화엄사를 꼽았다. 현재의 절터에는 서봉사의 유물로 보이는 석조부재가 산재되어 있다. 서봉사지를 절골 이라고도 하며 통일신라 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규모의 절로 경술년에 폐사되었다고 전해지며 조선 철종 3년 (1825년)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서봉에서 알 수 있듯이 300년 전 빈대가 많아 불태워 없앴다고 전한다. 분명한 것은 선종에 대한 반감세력이나, 외부 침략에 의해 소실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구름사이로 산 고개 하나가 봉우리를 덮었는데
절에는 무처님의 연꽃이 땅에 가득 하네
생각해보니 큰 스님이 돌아와서 좌정하고
밤이 깊어가기를 기다려 차가운 종을 때린 가보네.
(독수정과 서봉사를 배경으로 한 완산이광수가 남긴 14경의 서봉모종)
독수정의 뒤편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와 사찰의 광경을 그린 모습일 뿐 지금은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서걱거리는 대숲과 감나무농장 주인이 터가 좋아 외지인이 종교부지로 쓰려고 팔라고 하지만 묵살하고 지킬 뿐이다.
한때 이절에서 김덕령장군이 수학하였으며 연화스님과 의 사랑이야기도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 함충이재
6.25전쟁 후 궁핍한 생활로 식량을 얻기 위해 담양. 화순 사람들이 땔감을 해다가 광주시장에 내다 팔고 넘나들면서 서로의 소식을 전했던 소통의 고갯길이다. 꾀꼴봉 동남쪽에 이 고개를 꾀꼬리가 벌레를 물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함충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넘나들었고, 동학혁명 때는 농민군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넘었던 길이다.
무돌길 6길 (백남정재)
코 스 : 경상마을(노거수) - 경상저수지 - 백남정재 - 무동마을정자 4km
대중교통 : 담양225번 (첫차6시40~막차21시)1시간 간격, 인암삼거리 이동 20분
주변안내 : 옥녀탕, 경상저수지. 무동리돌탑/돌샘
의병들이 요충전략지로 수백 명이 넘어 다니던 백남정재
마을의 형상이 마치 아이가 춤을 추는 형국 무동마을
담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운 김태원의병장 전적기념
6길은 배넘이재, 무동촌재 시멘트포장길을 가다가 숲길로 들어 호남정맥인 백남정재로 오르게 된다. 이길은 상당히 험하고 음산하기 까지 한다. 산행시간도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된다. 임진왜란 동학농민혁명전쟁 한 말등 나라를 구하기 위한 우국지사 의병들이 요충전략지로 이용한 수십 명 수백 명이 넘어 다니던 길이 백남정재이다. 가끔 멧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으로 조심을 요한다. 정상부에 있는 돌무더기는 마치 마을 입구 성황당처럼 이곳을 지나는 길손의 안녕과 복을 빌었고 위급할 때는 무기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지난날 도둑의무리가 행인들이 소지품을 터는 일이 종종 일어나 장정 백 명이 모여야만 넘을 수 있다 는 말은 왜곡된 말이다.
백남정재에서 무동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올랐던 길에 비해 아주 쉽고 짧다. 마을의형상이 마치 아이가 춤을 추는 형국이므로 무동이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에는 돌샘이 있고 김태원 의병장과 관련된 전적지가 있다.
돌샘은 무돌길중에 가장 자연적이고 전통적 아름다움을 가진 시암이다. 이곳을 지나 샘에서 인기척만하면 근처에 사시는 할머니가 나와 친절하게도 바가지를 건네준다. 물맛이 참 좋다. 친절한마을 인내심에 길을 가는 이들의 마음이 훈훈해지는 구간이다.
2004년에 담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운 김태원의병장 전적기념 동상이 남초등학교(인암초교) 안에 자리하고 있다. 무동촌 돌담 뒤에 숨어서 당시 구국의 일념에 불타던 김태원의병장이 항일의병탄압에 악병 높았던 일본군 요시다 부대장을 총살했다.
호남정맥인 백남정재를 능선으로 담양의 영산강 수계와 화순쪽 섬진강 수계로 나눈다.
무돌길 7길 (이서길)
코 스 : 무동마을정자 - 무동저수지 - 송계마을(인계리) - 서동마을 - 용강마을 - 영평마을(이서초등학교) 3km
대중교통 : 군내버스 217-1번(광주광천터미널 - 화순 인계리)
주변안내 : 시무지기폭포(수량이 적음), 정자골 발효숙성연구소
송계마을의 뜻은 마을에 큰 소나무가 있어
용강마을은 물이 따뜻하다하여 온수골이라
용이 승천하였다는 용당폭포
송계마을은 원래 마을모습이 삽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삽 재라 불렀는데 이후 송계마을의 뜻은 마을에 큰 소나무가 있어 이렇게 부른다. 송계마을 동쪽과 북쪽은 구룡고개에서 이어진 산등으로 형성되어 있고 서쪽은 무등산 줄기가 마을 뒤까지 형성되어있다. 예전에는 100명의 걸인에게 동시에 숙식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을이 번창하였으나 6.25때 마을이 소각되어 현재는 13호가 살고 있다.
서동마을의뜻은 서석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서동촌이라 하였다. 또 인동이라 한 적도 있었는데 인동마을의 뜻은 어진사람이 난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서동마을 동쪽으로는 평야가 형성되어있고 담양과 접하는 부분에 망월봉이라는 바우산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무등산이 있다.
용강마을은 처음에는 물이 따뜻하다하여 온수골이라 불렀다고 하며 이후 용계 라 하였는데 용계 의뜻은 산등아래 골짜기에 있는 동내라는 의미이다. 용강마을은 무등산자락 서북쪽을 뻗어와 마을의 북쪽을 감싸며 동쪽까지 뻗어 내리고 있는데 외부와는 남동쪽으로 열려 있다 서쪽에 있는 무등산에서 발원한 내가 용당폭포 (23m)를 만들고 마을가운데를 지나 서남쪽으로 흘러 용계제 저수지로 유입된다.
- 용당폭포
마을서쪽 뒷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용이 승천하였다고 하여 용당이라 하며 용당폭포 못받(용두석)이 있었으나 물이귀할 때 인근농지에 물을 대기위해 주민들과 권세가들의 마찰이 있자 농부가 돌로 용두석을 깨버렸는데 용두석이 떨어진 부분에서 피가 나왔다고 전한다.
무돌길 8길 (영신길)
코 스 : 영평마을(이서초등학교)-장복마을(도원마을)-영실골길-ok목장-안심마을정자 4km
대중교통 : 군내버스 217-1번(광주광천터미널 - 화순 인계리)
주변안내 : 영실골
무등산의 산신령님이 세우신 마을이라고 하여 영신이라
유평마을은 땅버들이라 부르는데 이를 한자로 유평이라
도원마을 이라 한 것은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의 의미
영평마을의 지명은 영신마을과 유평마을을 합하여 영평리 라고 하였다. 영신마을의 뜻은 이곳에 영신사 라는 절이 있어 영신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태조이성계가 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창업하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백세천년의 왕업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억울하게 죽은 고려 명신들의 영혼을 달래고자 팔도명산을 모두 찾아가 정성껏 삼일기도를 드렸으나 오로지 무등산의 산신만이 거절하자 이태조가 노래하여 이산을 무정산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전한다. 무등산의 255m 지점에 위치한 영신마을은 무등산의 산신령님이 세우신 마을이라고 하여 영신이라 했다고 전한다. 영신마을 남서쪽으로는 장복동을 거쳐 장불재를 넘어 광주로 이어져 있다. 서쪽으로는 규봉암에 올라가는 길이 있다. 동남쪽으로 평야가 형성되어있고 무등산에서 발원하는 영신천이 마을의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간다.
유평마을은 원래 긴 능선이 뻗어온 곳으로 땅버들이라 부르는 곳인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유평이라 한 것이다.
도원마을 이라 한 것은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의 의미로 도원이라 하였다. 도원마을은 무등산 동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쪽은 멀리 적벽산이 보일정도로 트여 있으나 산비탈이고 남쪽으로 무등산자락이다. 마을남쪽 산골짝에서 발원하는 내가 마을남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보월리로 간다. 서쪽은 무등산 정상이 있는데 정상에 못 미쳐 규봉암이 있고 그 남쪽으로는 광주로이어지는 장불재가 있다.
무돌길 9길 (안심길)
코 스 : 안심마을정자 - 안심저수지 - 안양산휴양림 3km
대중교통 : 군내버스 217-1번(광주광천터미널 - 화순 인계리)
주변안내 : 안심저수지, 안양산휴양림
둔병재는 화순읍 수만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주요도로
도로를 건너게 되어 위험 나지막한 둔덕을 인도로 조성
삼림욕의 최대효과를 얻을 수 있는 울창한 안양산 휴양림
안심마을동쪽으로는 약간의 평야가 있으며 그 너머로는 별산의 줄기가 뻗어있으며 서쪽으로는 무등산의 한 줄기로 뻗은 안양산(853m)이 있고 남쪽으로는 둔병재와 갈두리에서 발원한내가 북쪽으로 흘러 마을앞쪽에서 동족으로 흘러간다.
마을 앞 둔병재는 화순읍 수만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주요도로이었었다.
무등산을 조망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인 도원마을 축사에서 악취발생은 상수원보호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이전조치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며. 안심마을에서 굴다리를 통과하여 농로 길을 걷다보면 햇볕에 노출됨은 가로수를 조성하여야 할 것이며 안심저수지 가는 길에 큰 도로를 건너게 되어 위험으로서 주의 장치 설치요망하며 휴양림인근에 오면 인도가 없어 도로를 걷게 되는데 도로 옆 나지막한 둔덕을 인도로 조성하였으면 한다.
- 안양산 휴양림
무등산의 동쪽 백마능선 끝에 위치하는 안양산기슭 해발 300-400m에 자리 잡고 있으며, 50년생의 아름다운편백나무와 삼나무의 울창한 숲으로 운치를 더하고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의병들 주둔지로써 조국을 수호하려는 선조들의 애국애족정신이 깃들어있는 곳이기도 하다. 광주시와는 30~40분 화순읍에서는 10분 거리로 도시민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며 경관이 수려한 무등산의 아들산인 안양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인공림인 편백나무, 삼나무와 천연림인 소나무와 참나무 숲이 조화롭게 어울려져 삼림욕의 최대효과를 얻을 수 있는 울창한 산림속에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 휴양림이다.
무돌길 10길 (수만리길)
코 스 : 안양산휴양림 - 둔병재 - 물촌마을 - 수만리계곡길 - 큰재주차장 4km
대중교통 : 군내버스 217-1번(하루3번18:00, 13:30, 16:30)
주변안내 : 수만리계곡길 , 큰재
의병활동이 활발했고 병자호란의 역사가 깃든 둔병재
물촌마을의 뜻은 이곳에 물이풍부하고 차가와 물찬 내라고
만연산특화숲 조성단지는 학생들의 현장학습장
제10길은 의병활동이 활발했고 병자호란의 역사가 깃든 둔병재와 멀리 순천, 승주, 이서, 북면, 주민들과 수만리 주민들이 화순읍과 광주로 가기위해 이용한길로 번성기 때는 물촌마을 주변에 주막이 4~5개 있을 정도로 왕래가빈번한 길이었다. 안양산을 등에 지고 물촌마을의 안산과 만연산까지 합세해 포근하게 껴안은 것 같은 편안한 길이다. 수만리 계곡엔 안양산과 만연산의 많은 수량의물이 계곡을 지나가 논농사 짓기에 최적의지역이다. 물길을 따라가면 동면 서성리의 서성리 저수지와 환산정이 있다. 만연산 큰재에 오르면 화순읍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수만리 지명은 수촌마을과 만수마을을 합하여 수만리라 하였다. 수만리는 물촌마을, 새터마을, 만수마을, 중지마을 등 4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있다. 물촌마을의 뜻은 이곳에 물이풍부하고 차가와 물찬 내라고 부른다. 후에 물촌이라 하였고 한자로 표기하기는 수촌이라 하였다. 새터마을은 새로 형성된 마을이란 뜻이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신기라하였다.
만연산 특화숲 조성단지는 큰재주차장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만연산특화숲 조성단지는 학생들의 현장학습장으로 데크와 함께 단장되어 있다. 화순군이 화순교육청 부지를 2004년에 매입하여 밤나무 군락지의 나무를 베어내고 물이 많은 지역이라 습지학습장을 이용하기위해 조성하였다 10h의 땅에 3000여 본의 나무와 18만 본의 야생화를 식재하였다.
무돌길 11길 (화순산림길)
코 스 : 큰재주차장(산림공원길) - 만수동길 - 중지마을정자 4km
대중교통 : 군내버스 217-1번(하루3번18:00, 13:30, 16:30)
주변안내 : 큰재철쭉길, 만연산, 만연폭포
큰 재에서 바라보는 안양산과 수만리의 전경은 호남의 알프스
오르막에 차가 뒤로 가는 착시현상 도깨비도로
전망대에도착하면 수만리의 조망을 한눈에 볼 수 있어
11길은 수만리 주민들이 화순과 광주로 가기위해 이용한 길이었다. 겨울이면 화순읍과 수만리 사람들이 땔감을 마련하고, 봄이면 산나물을 채취하여 만연산을 찾을 때 많이 이용한 길이다. 중간쯤에 참 샘이 있는데, 그곳에서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지금은 잘 정리된 철쭉 길과 이국적인 안양산과 수만리의 조망은 가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고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큰 재는 화순 너릿재와 함께 화순에서 가장유명한재다. 겨울에 눈이 조금만 많이 오면 넘나들기 힘들 정도로 험한 길이었다. 산림길이 끝날 즈음에 도깨비도로가 있다. 오르막에 차가 뒤로 가는 착시현상을 느낄 수 있는 도로다 큰 재 정자에서 바라보는 안양산과 수만리의 전경은 말 그대로 호남의 알프스다.
- 만연산
해발고도 668m로 화순읍 쪽에서 바라보면 날카로운 바위무리가 솟아있고 곳곳에 너덜이 있어 험하게 보인다. 화순읍 사람들이 등산코스로 많은 이용을 하고 있다. 화순 큰 재를 지나 전망대에도착하면 수만리의 조망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그 아름다움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정상에 이르면 무등산, 안양산, 화순읍, 광주 이서 등 이 보인다.
- 만연사
고려시대인 1208년 만연선사에 의하여 창건 되었다고 전하는데 만연선사가 무등산 원효사에서 수도를 마치고 조계산송광사로 가는 도중에 무등의 주봉을 넘어 남으로 내려오다가 만연산중턱에 이르러 피곤한 몸을 잠시쉬어 가고자 앉은 사이 언뜻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16나한이 석가모니불을 모실역사를 하고 있는 꿈 이었다. 그길로 이곳에 토굴을 짓고 수도를하다가 만연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 만연폭포
한여름이면 신경통환자들이 자주 찾아 병을 치유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예날 만석이와 연순이는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만석이가 전쟁터에 나가게 되어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연순이는 돌아오지 않는 만석이를 기다리다가 부모의 강압에 못 이겨 다른 이와 혼인 하던 날 그 자리에서 몰골이 상한 만석이를 보게 되었다. 초야에 연순이는 신방을 뛰쳐나와 만석이를 몰래 만나 여기폭포에 이르러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 저승에서 해보자며 폭포 아래로 떨어져 사람들로 하여금 애틋함을 갖게 하였다. 이런 연유로 이 폭포의 이름을 만연폭포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10여m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노라면 간담이 서늘해 여름날의 더위는 싹없어질 것이다.
무돌길 12길 (만연길)
코 스 : 중지마을 - 만연재 - 곰적골 - 용연마을 4km
대중교통 : 군내버스 217-1번(하루3번18:00, 13:30, 16:30)
주변안내 : 수만리계곡길 , 큰재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길이라 너릿재 와 만년재에는 산적도 종종
물촌마을의 뜻은 이곳에 물이풍부하고 차가와 물찬 내라고
만연산특화숲 조성단지는 학생들의 현장학습장
12길은 수만리 중지마을 정자부터 만년재 무성이골을 거쳐 광주용연마을에 이르는 구간이다. 힘들이지 않고 1시간30분 안팎이면 걸을 수 있다. 화순북면, 이서, 순천, 승주사람들과 수만리 주민들이 광주로 가기위해 이용했던 길이다. 지금 닭전머리가 우시장이었을 때 소를 끌고 사고팔기 위해 드나들었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길이라 너릿재 와 만년재에는 산적도 종종 나타났다고 한다. 중지마을은 예부터 한봉 약초 흑염소 사슴 등이 유명했다. 동쪽으로는 안양산 서쪽으로는 무지개재 남쪽으로는 만연산 북쪽으로는 무등산이 있다. 마을의 방향은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중지마을 돌담을 따라 길을 잡으면 너와나 목장으로 더 유명한 만연재 소나무 숲 풍광이 아름답다. 이 목장 길은 광주에서 장불재를 올랐다가 화순으로 넘어가거나 동구 용연마을로 향하는 등산객들이 이용하는 길이다.
화순과 광주의 경계인 이길은 수만리사람들이 광주로 가기위해 넘어 다녔다. 농부들이 애써 가꾼 곡식을 이고지고 길을 넘어 남광주시장 까지 걸어가 내다 파는 길 무돌길 모두가 그렇듯 무등산자락 사람들의 피와 땀 삶이 길에 고스란히 배어있다.
주변의 산 정상이 시야에서 꽤나 가깝게 들어온다. 내리막길이 이어지나 등산로처럼 가파르지는 않다. 용연계곡을 따라 걸으면 사색과 여유가 있는 호젓한 길섶이 이어진다. 겨우 한명이 걷기에 충분한 길옆은 심한경사면에 나무가 빼곡히 심어져있고 그 아래쯤에는 계곡이 흐른다. 오늘 내린 비로 계곡물소리가 끊임없이 함께한다. 만연재에서 무성이골로 이어지는 길은 행정구역도 화순과 광주의 경계지역이다. 무성하게 우거진 숲속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
좁은 길을 빠져나오니 당산나무 한 그루가 시야에 들어온다. 산중턱에서는 소리만 들리던 계곡의 모습이 당산나무 옆으로 가니 드러난다. 여름이면 피서객이나 등산객들의 땀을 식혀줄 수 있는 공간이다. 용추계곡일원은 꿩, 청설모, 다람쥐 등 조수보호구로 지정돼있다. 야생조수 보호. 번식과 서식환경 유지를 위한 것이다.
용연마을의 행정명은 지원2동이다. 지원동은 수원지가 있는 곳 이라는 뜻에서 용연동은 비롯됐다. 마을에는 옛날 돌 담집 몇 채가 그대로 남아있고 그 앞에 새로 지은 집은 마을분위기와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무돌길 13길 (용추길)
코 스 : 용연마을 - 제2수원지 - 용추계곡 - 용연정수장 - 교동 - 선교동정자 2km
대중교통 : 지원52번, 지원150, 지원151, 지원152
주변안내 : 용연당산나무, 용추폭포
제2 수원지 시원한 물이 흐르는 용연계곡
마을 정자 옆에 500년 넘은 듯 한 귀목나무 한그루
광주상수도는 하루 83만㎥을 공급할 수 있는 시설
13길은 무등산남쪽으로 흐르는 용추계곡을 따라서 형성된길이다. 용연마을을 지나 선교동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당초 논과 밭 사이를 지나는 길이었으나 용연정수사업소가 생기면서 포장도로로 변하였다. 광주끝자락에 위치한 제2 수원지 시원한 물이 흐르는 용연계곡 화순만연재의 숲이 어우러져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과거 광주와 화순을 왕래하던 너릿재로 넘어가는 봄의 벚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용연마을은 무등산의 남서쪽 계곡의 깊은 곳에 위치하여 광주시의 제2 수원지 아랫마을로 마을의 남서쪽 계곡만 트여있고 나머지는 산으로 싸여 있다.
마을정자 옆에 500년 넘은 듯 한 귀목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잎이 만들어낸 그늘이 족히 사방 10미터는 넘을 정도로 무성하고 품이 넓다. 옛날 소를 훔쳐 달아나던 도둑이 밤새 나무 주변만 뱅뱅 돌다가 결국마을사람들한테 잡혔다거나 일제 강점기 이 나무와 함께 서있던 할머니 나무를 베어낸 일본사람이 비명횡사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 정수장
광주상수도는 1920년에 하루 800㎥을 공급하기 시작한 이래 현재는 하루 83만㎥을 공급할 수 있는 시설로 성장하였다. 상수원은 수돗물을 만드는 원료인 원수를 공급해 주는 시설로 하천 , 호소(저수지), 지하수, 지하수 등이 있는데 광주의 경우는 95%이상 호소이며 , 주로 동복호의 물을 사용하고 전남의 여수 순천 목포등과 함께 주암호의 물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수장은 광주의 경우 총 6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중
주암호 물을 정수 처리하는 덕남정수장 (하루 44만㎥정수능력),
동복호 물을 정수 처리하는 용연정수장(하루 24만㎥ 정수능력)과
지원정수장 (하루 8만㎥ 정수능력, 비상시 2수원지 물도 사용), 산장입구에 있는
제 4수원지물을 사용하는 각화정수장(하구 3만㎥정수능력) 등이 있다.
무돌길 14길 (광주천길)
코 스 : 선교정자-광주천길(주남―지원동-소태동-학동)-남광주역(남광주시장)등 4.8km
대중교통 : 9. 12. 15. 25. 37. 45. 49. 51. 52. 54. 59. 95 지원150, 지원151, 지원152
주변안내 : 지하철 녹동 종착역, 소태지하철역, 학동지하철역, 증심사 지하철역
유일한 수변녹지이면서 양호한생태계를 갖춘 광주천
광주천에는 크고 작은 다리가 29개나 가설
무미건조한 광주천 다리에도 역사의 숨결이 스며있다
14길은 하천을 따라서 걷는 길이다. 광주도심에서 유일한 수변녹지이면서 양호한생태계를 갖추고 있다. 광주 생태 하천 길로 길을 걸으며 둔치식물과 수생식물을 관찰할 수 있으며 여러 종류의 새들과 물고기를 볼 수 있다.
2004년부터 추진한 자연형 하천정화 사업으로 정비된 징검다리 여울 등 시민 휴식공간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시민에게 휴식 공간 , 체육공원 자전거 도로 등으로 다양하게 이용된다.
광주도시 한복판에 다리가 즐비하다. 광주천에는 크고 작은 다리가 29개나 가설돼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커다란 의미의 대교라는 이름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교량디자인도 무덤덤하고 길이도 짤막하다. 하지만 이 무미건조한 광주천 다리에도 역사의 숨결이 스며있다. 우리가 이야기를 역어내고 풀어 해 치지 못했을 따름이다.
광주천은 동구지원동 무등산 장불재 샘골계곡에서 발원하여 학동, 금동, 임동, 유덕동에 이르기까지 총연장 24.2km를 흘러 극락강과 합류한다. 광주천은 광주도심에서 유일한 수변녹지축이자 양호한 생태계를 갖추고 있는 광주시민의 자연자산으로 친수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인구가 밀집한 도심 내에서 거의 유일한 오픈페이스 이며 도시의 허파이다.
광주천은 또 1960년대 말까지 광주시민의 생활터전으로 빨래터 농공업용용수 체육공원 자연학습공간으로 이용됐다. 특히 천변공터는 위락공간으로 난장 천막공연 보름달 다리 밟기와 쥐불놀이가 성행했다.
무돌길 15길 (푸른 길)
코 스 : 남광주역사(남광주시장) - 폐선푸른길(학동 - 서석동 - 산수동 - 계림동 - 중흥동) - 광주역 4.km
대중교통 : 01. 15. 80 187
주변안내 : 남광주역, 남광주시장, 광주역
남광주 시장은 광주에서 제일가는 수산물시장으로 명성
광주도심 한가운데에 길이 10.8km 넓이 4만 8천 평의 선형 녹지공간
광주의 철도는 근대문물의 유입과 일제 수탈의 통로
15길은 도심내의 철도를 도시 외곽으로 이설후 남은 폐선 부지를 자연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생명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길이다. 도심속의 숲을 연상할 수 있다. 또한 5.18민주호화운동의 발원지이기도 하여 광주의 살아있는 역사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남광주 시장은 오래전부터 농어촌에서 기차를 이용하여 채소와 생선을 남광주 시장에 내다팔았다. 남광주역이 없어진 지금도 광주에서 제일가는 수산물시장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옛 남광주역 부지에는 농어촌에서 채소와 생선을 가지고와서 파는 새벽시장이 매일 오전5-9시까지 열린다.
남광주 시장은 철도교통이 편리하여 전남 동남부 일대가 전부 남광주 시장이용객이었다.
여수 . 순천에서해산물을 가져오는 보따리장수뿐 만아니라 벌교, 보성, 화순등지에서 장을 보려고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남광주역까지 와서 장을 보고 갔던 곳이다. 남광주시장의 옆에는 남광주역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여수. 순천 이곳에서 잡아 올린 해산물을 기차에 실고와 남광주역에서 많이 팔곤 했다. 전남도청과 남광주역이전의 영향으로 시장은 활력을 잃어 가고 있다.
폐선 푸른 길공원 푸른 길조성은 국내에서 철도부 지를 공원으로 조성한 최초의 사례이며 폐선부지용도를 주민이 제안해서 결정한 시민참여 도시계획 모델로 국내외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광주도심 한가운데에 길이 10.8km 넓이 4만 8천 평의 선형 녹지공간이조성 인구 140만이 모여 사는 대도시에서 이처럼 큰 규모의 녹지공간이 도심에 조성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광주역 광주의 철도는 근대문물의 유입과 일제 수탈의 통로로 활용되기 위해 1922년 송정 리에 첫 도입되었다. 이후 송정리역에서 광주역까지 철도가 완성되고 광주역을 중심으로 담양. 여수 등으로 나아가는 사통팔달의 철도가 완성되었다. 1970년대 이후 도시화로 인해 철도는 도심내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각종 소음피해와 교통 혼잡 열차사고들이 빈번해지자 광주시는 도심 내 철도를 외곽으로 이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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