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무등산사랑 환경대학(41기)
(무등산 해설사 기본 과정 / 야외강의 자료)
◆무등산권 누정문화의 이해◆
◐ 일시 : 2015년 09월 20일
◐ 가사문학관~ 식영정~ 광주호생태공원 -(점심)-
~환벽당 · 취가정~ 소쇄원
◐ 강 사 : 김 종 윤 (010-6543-8259)
* 기아자동차근무, 문화유산해설사,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석사 과정
1. 무등산권 원림(누정)으로 들어 가면서
무등산권역을 접하고 있는 북구 충효동과 죽향 그윽한 고장 담양은 가사문학의 보고이다. 원효계곡을 따라서 이루어진 원림(園林) 그대로를 살린 누정에서 학문과 예술혼을 불태웠고, 시인 묵객들이 원림과 누정을 가꾸고 터를 잡아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유서 깊은 곳이며 충효를 실천했던 곳이다. 의향과 예향이 오롯이 깃든 시·가문화권에서 고려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하였던 서은 전신민. 조선조 시대 순으로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 면앙정 송순, 지족암 오겸, 석천 임억령, 사촌 김윤재, 소쇄처사 양산보, 하서 김인후, 서화당 김성원, 고봉 기대승, 귀봉 송익필,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 백호 임제, 충장공 김덕령, 석주 권필의 문학과 역사적 발자취를 나라서 누정 문학기행을 떠나보자.
2. 가사문학관
▶위치: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319번지 (5,017평 8개동)
이지역에서 발전한 시·가문학과 관련 등장하는 선조들의 얼을 계승하려는 뜻에서 담양군이 설립했다. 본관동에 영상실과 전시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영상실에서는 여려 누정들과 송순을 비롯한 시·가문학의 선조들의 업적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전시실에는 관련 유물과 누정문학, 풍류문화 시·서·화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을 먼저 견학을 잘하면 시·가문학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3. 식영정
▶위치: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 75-1번지
▶지방기념물 제1호 (1560년)
주변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식영정. 자미탄은 역사속에 사라졌지만 그를 대신하듯 정자 아래 펼쳐진 광주호와 어울어진 빼어난 소나무 풍광이 가사문학의 산실인 성산별곡속에서 무릉도원이라 표현 했던 곳이다. 식영정은 원래 16세기 중반 서하당(棲霞堂) 김성원(1525~97)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1496~1568)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 한다. 정자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이고 단층 팔작지붕이며, 온돌방과 대청이 절반씩 차지한다. 가운데 방을 배치하는 일반 정자들과 달리 한쪽 귀퉁이에 방을 두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깐 것이 특이하다. 자연석 기단 위에 두리기둥[圓柱]을 세운 굴도리 5량의 헛집구조이다
▲ 그림자가 쉬고 있다는 뜻의 '식영息影'
식영정은 정자의 이름을 지으면서 장인과 사위 사이에 <장자>에 나오는 (그림자를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사람 이야기를 말하고 나서)그림자는 언제나 본형을 따라다니게 만련이다. ,,,,,, 인과응보이다. ‘그림자는 내버려두고 그 이전의 경지에서 조화옹(造化翁)과 더불아 노닌다’ ‘그림자도 쉬어간다’ ‘바람따라서 자연과 어우려지니’ 자연의 서정적 호방한 순리와 무애(無碍)한 경지의 그림자 이야기가 오갔던 모양이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식영정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주고. 툇마루에 앉아 개울과 물이 가득한 광주댐을 바라보니 가슴이 탁 트인다.
이곳에 도로와 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소쇄원, 식영정, 취가정, 환벽당을 양품에 안고 너른 뜰과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창계천과 증암천에 자미꽃이 흐드려지게 피어 붉은 꽃이 강물에 떠 다려서 옛날에는 자미탄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미'는 배롱나무의 별칭이고 '탄'은 여울이라는 뜻이니 개울 양옆으로 늘어선 배롱나무의 아름다움으로 얻은 이름이다.
'난간에 서서 고기를 보다' '양파에 오이 심어'
'벽오동에 비치는 서늘한 날' '평교 목동의 피리소리' '다리를 건너 돌아가는 스님' '배롱나무 꽃 핀 여울' ' 연못에 꽃필 때' ......
그들이 읊은 시들은 모두 은일자의 맑은 뜻과 다짐이 서려 있고, 자연과 벗하는 즐거움에 애써 자위하는 내용들이다.
식영정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한 글은 송강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이다.
식영정 앞산인 별뫼, 성산을 노래한 이 가사의 첫머리는 식영정 주인 김성원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그처럼 낫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서하당유고》행장에 따르면, 김성원이 36세 되던 해인 1560년(명종 15)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으로 정철보다 11년이나 연상이었으나, 정철이 이곳 성산에 와 있을 때 환벽당에서 같이 공부하던 동문이기도 하다.
식영정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은 어린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놓게 한 사촌 김윤제가 기거했던 곳이다. 당시 사람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高敬命), 정철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불렀는데, 이들이 성산의 경치 좋은 20곳을 택하여 20수씩 모두 80수의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을 지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 식영정이십영은 후에 정철의 《성산별곡》의 밑바탕이 되었다.
이 외에 정철은 식영정잡영 10수, 하당야좌(霞堂夜坐) 1수, 차환벽당운 1수, 소쇄원제초정 1수, 서하당잡영 4수 등 수많은 한시와 단가 등을 남겼다.
그는 이곳을 무대로 하여 송순, 김인후, 기대승 등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고경명, 백광훈, 송익필 등과 교우하였다.
식영정 옆에는 1973년에 《송강집(松江集)》의 목판을 보존하기 위한 장서각을 건립하였으며, 1972년에는 부속건물로 부용당(芙蓉堂)을 건립하고, 입구에《성산별곡》시비를 세웠다.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紫薇灘), 노자암, 견로암, 방초주(芳草州), 조대(釣臺), 서석대(瑞石臺) 등 경치가 뛰어난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거의 물속에 잠겨버렸다
4. 환벽당(環璧當) ‘푸르름으로 둘러싸인 집’
▶위치: 광주광역시 북구 환벽당길 10 (충효동)
창계천을 사이에 두고 식영정과 마주보고 있는 환벽당은 예전에 사촌 김윤제와
서화당 김성원이 창계천 위에 다리를 놓고 서로 오가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원효계곡의 물이 광주호 상류 창계천가의 충효동쪽 언덕 위에 자리잡은 환벽당은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지낸 사촌 김윤제(金允悌:1501∼1572)가 낙향하여 창건하고 육영(育英)에 힘쓰던 곳이다. 당호(堂號)는 영천자 신잠(靈川子 申潛)이 지었으며, 벽간당(碧澗堂)이라고도 불렀음이 고경명(高敬命)의 유서석록(遺書石綠)에 기록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2칸,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2칸을 방으로 하여 앞쪽과 오른쪽을 마루로 깐 변형된 형식이다. 원래는 전통적 누정 형식이었으나 후대에 증축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우암 송시열(尤庵宋時烈)이 쓴 제액(題額)이 걸려있고, 석천 임억령(石川林億齡)과 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환벽당에 관한 시는 정철이 지은 2수가 있는데, 송강속집과 광주목지에 실려 있다. 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사촌 김윤제에 대하여
김윤제(1501~1572)는 본관이 광산으로, 충효리에서 태어나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교리겸춘추관(承文校理兼春秋官)으로 벼슬길에 나아간 뒤 홍문관교리(弘文官校理)를 거쳐 나주 목사 등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그만두고 충효동 고향으로 돌아와 환벽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을 썼는데, 송강 정철(松江鄭徹 1536~1593)과 누하당 김성원(樓霞堂 金成遠) 등이 대표적인 제자이다. 이곳은 송강 정철과의 인연이 깊은 곳으로 송강이 아버지 정유심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향살이를 치르고 풀려난 뒤 처가가 있는 창평으로 낙향한 것이 인연이 된다. 송강이 담양 고서에 머물을 당시 그의 형 소가 순천 처가에 의탁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형을 찾아 가던 길에 날씨가 더워 환벽당 아래 조대(釣臺) 용소(龍沼)에 이르러 옷을 홀딱 벗고 목욕을 하였다 한다. 이 때 사촌이 낮잠을 자는데, 용소에서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서 급히 내려가 보니 어린 소년이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촌은 송강을 대려다가 제자로 삼고 그의 외손녀와 송강에게 출가 시켰고, 송강이 27세로 과거에 급제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공부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과 김덕보(金德普)형제는 그의 종손(從孫)으로 역시 학문의 영향을 받았다. 창계천 동북쪽으로 250m쯤 떨어진곳에는 식영정(息影亭)이 있으며, 환벽당 바로 곁에는 취가정(醉歌亭)이 있다. 인근에는 독수정(獨守亭)과 소쇄원(瀟灑園)이 자리잡고 있어 바로 이 일대가 조선시대 원림 문화(苑林文化)의 중심 지역임을 알 수 있다.
5. 취가정(醉歌亭)
취가정(醉歌亭)은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광주호 옆 성안마을 뒷동산 동쪽에 있는 정자이다. 1890년 김덕령 장군의 후손 난실 김만식과 친족들이 충장공의 성장지에 지었다. 그 후 1950년 6·25 동란으로 불타버린 것을 난실의 후손인 김희준과 친족들이 1955년에 중건하였다. 정자의 이름을 취가정이라 한 것은 권필의 꿈에 억울하게 죽은 김덕령 장군이 술에 취해 나타나 서로 시를 나누었는데 외로운 혼을 달래기 위한 《취시가》를 읊은 데서 유래된다.
권필이 김덕령과 꿈속의 대화 취시가(醉時歌) 를 김덕령을 위해 한 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는
취했을 때 노래하노니 / 醉時歌
듣는 사람 아무도 없네.此曲無人
나는 꽃이나 달에 취하고 싶지도 않고 聞我不要醉花月
나는 공훈을 세우고 싶지도 않아 我不要樹功勳
공훈을 세운다니 이것은 뜬 구름 樹功勳也樹浮雲
꽃과 달에 취하는 것 또한 뜬 구름일세 醉花月也是浮雲
한 잔 하고 부르는 노래 한 곡조, 醉時歌
이 노래 아는 사람 아무도 없구나.此曲無人知
내 마음 다만 원키는 긴 칼로 밝은 임금 받들기를 원하노라我心只願長劍奉明君
김덕령이 감옥에서,.....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핀 꽃 다 붙는다.
너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연기)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이 없어 하노라.
김덕령 살아 있는 동안과 돌아가신 뒤의 억울하고 한이 맺힌 비통한 심정을 읊은 노래에 권필이 취시가에 화답한다.
지난 날 장군께서 쇠창을 잡으셨더니 / 장한 뜻이 중도에서 꺾여지니 운명인걸 어찌할거나 돌아가신 그 넋의 그지없는 눈물/ 분명한 한 곡조 취시가로 나타냈구료
將軍昔日把金戈 壯志中최奈命何 地下英靈無限恨 分明一曲醉時歌
한을 품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악 비(岳飛))의 원통한 한을 품었으니 그 충성스러운 혼과 의로운 넋이 분명히 산하의 장한 기운으로 맺히었고, 떨쳐서는 천둥 같은 위엄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소박한 꿈은 사라졌다.
거문고타고 노래하는 것을 영웅의 일이 아니니
칼춤을 추면서 모름지기 장수의 옥 장막에서 노닐 것이다
훗날 평난되어 칼을 씻고 돌아온 뒤에 강호에서 낚시질 하는 외에 다시
무엇이 구하리. 絃歌不是英雄事 劒舞要須玉帳遊 他日洗兵歸去後 江湖漁釣更何求
그의 뜻을 가히 알 수 있는데 미처 성공하기도 전에 명성이 너무 성해져서 마침내 비명에 죽고 말았으니 남쪽 사람들이 지금도 그를 슬퍼한다.
이 정자에 올라 그 노래(醉時歌)를 읊으니 또한 어찌 그 감정이 격하고 기운을 토하지 않겠는가. 그런즉 '취했을 때 부르는 노래'란 이름이 어찌 우연이라고 하겠는가!, 김덕령 장군에 대한 구전이 많이 전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내용으로 노산 이은상도 시를 지어 그를 위로했다.
덕령이 어디 갔나 / 백마야 어디 갔나
어허 덕령이 어디 갔나 / 백마 데리고 어디 갔나
오늘은 청궁 마산리로 말 달릴 이 없구나.
6. 소쇄원
소쇄원은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자연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주거와의 관계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후원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을 위한 집으로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 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뜻의 손님을 위한 사랑방으로 1614년 중수한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
광풍정과 제월대의 이름은 송나라 黃庭堅(황정견)이 북송의 대 성리학자 周敦(주돈)의 인품을 형용하여 "가슴속의 맑고 깨끗함이 光風霽月(광풍제월/ 화창한 날씨의 바람과 비 갠 뒤의 달이란 뜻으로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비유)과 같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고,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제월당(霽月堂)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무와 기타 꽃나무을 심었다.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고 광풍각 뒷편 언덕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도오(桃塢)가 있다.
이 소쇄원을 만든 주인인 소쇄처사 양산보는 후손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정유재란때 왜적들의 집중적인 공략을 받은 이 지역은 불에 타버리고 주인의 손자인 양천운이 다시 중건하게 된 기록이 남아있으며, 5대손인 양경지에 의해 완전 복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쇄원은 은둔을 위한 정자이지만 그의 곧은 뜻을 알게된 사림들은 소쇄원을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주인과 교류를 하게 됨으로서 열린 공간으로 호남 사림의 명소가 된 것이다.
소쇄원 주인과 교류하였던 인사들의 면모를 보면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었다.
소쇄원 48영
小亭憑欄 (소정빙란) --조그만 정자 난간에 의지해서
沈溪文房 (침계문방)----시냇물 흐르는 문방에서
危巖展流 (위암전류) ---높고 위태로운 바위 위에 흐르는 물
負山鼇巖 (부산오암)----산을 짊어지고 있는 거북바위
石逕攀危 (석경반위)----위험한 돌길을 더위잡아 오르며
小潭魚泳 (소담어영)-----작은 연못에 고기떼는 노닐고
刳木通流 (고목통류)-----나무에 홈통을 뚫고 흐르는 물
舂雲水碓 (용운수대)-----물보라를 일으키는 물레방아
透竹危橋 (투죽위교)----통나무를 걸쳐놓은 높직한 외나무다리
千竿風嚮 (천간풍향)----대숲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
池臺納凉 (지대납량)-----연못가 언덕에서 더위를 식히며
梅臺邀月 (매대요월)----매대에서 달을 맞으며
廣石臥月 (광석와월)----넙적한 바위위에 누워 달을 보며
垣竅透流 (원규투류)----담장 밑에 구멍을 뚫고 흐르는 물
杏陰曲流 (행음곡류)----은행나무 그늘 아래에 굽어 도는 물
假山草樹 (가산초수)----석가산의 풀과 나무들
松石天成 (송석천성)----자연스레 자란 소나무와 바윗돌
遍石蒼蘚 (편석창선)-----바윗돌에 두루덮힌 푸른이끼
榻巖靜坐 (탑암정좌)-----평상바위에 고요히 앉아
玉湫橫琴 (옥추횡금)-----구슬같이 맑은 물가에서 거문고를 비껴안고
洑流傳盃 (보류전배)-----빙빙도는 물살에 술잔을 띄워 보내며
床巖對棋(상암대기)----평상바위에서 바둑을 두며
脩階散步 (수계산보)----긴 섬돌을 거닐며
倚睡槐石(의수괴석)-----홰나무가 바위에 기대어 졸며
槽潭放浴(조담방욕)-----조담에서 미역을 감고
斷橋雙松 (단교쌍송)----다리 건너 두그루의 소나무
散崖松菊(산애송국)-----낭떠러지에 흩어져 자라는 소나무와 산국화
石趺孤梅(석부고매)-----바위 틈에 피어난 매화
夾路脩篁(협로수황)------ 좁은 길가에 밋밋하게 묶은 대나무
迸石竹根(병석죽근)-----바위 틈바구니에 흩어져 뻗은 대 뿌리
絶崖巢禽(절애소금)-----낭떠러지에 둥지틀고 사는 새
叢筠暮鳥(총균모조)-----날 저물어오자 대 밭에 날아드는 새
壑渚眠鴨(학저면암)-----산골 물가에서 졸고있는 오리
激湍菖蒲(격단창포 )-----세차게 흐르는 여울가의 창포
斜簷四季(사첨사계)------빗긴 처마 끝에 핀 사계화
斜簷四季(도오춘효)-----복사꽃 핀 언덕에서 맞는 봄 새벽
桐臺夏陰(동대하음)-----고목이된 오동나무 언덕에 드리운 여름 그늘
梧陰瀉瀑(오음사폭)------오동나무 녹음아래 쏱아지는 폭포
柳汀迎客(유정영객)-------버드나무 물가에서 손님을 맞고
隔澗芙蕖 (격간부거)------골자기 건너편 갓피어난 연꽃
散池蓴芽(산지순아 )------연못에 흩어져 있는 순채 싹
櫬澗紫薇(츤간자미)----산골 물 가까이에 핀 백일홍
滴雨芭蕉(적우파초)-----빗방울 떨어지는 파초잎
映壑丹楓(영학단풍)------골짜기에 비치는 단풍
平園鋪雪( 평원포설)-----평원에 갈려 있는 눈
帶雪紅梔(대설홍치)----눈에 덮힌 붉은 치자
陽壇冬午(양단동오)------애양단의 겨울 낮
長垣題詠(장원재영)-----긴담에 써 붙힌 소쇄원의 제영
소쇄원에서 일일이 48영을 찾아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 송강정
서인에 속했던 정철은 1584년(선조 17) 대사헌이 되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에 대사헌직에서 물러났다. 그후 이곳 창평(昌平)으로 돌아와 4년 동안 조용히 은거생활을 했던 곳으로 송강정이라는 이름은 정철의 호인 송강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당시에는 이 초막을 죽록정(竹綠亭)이라 불렀다 한다. 지금의 정자는 1770년에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정철은 이곳에 머물면서 식영정(息影亭)을 왕래하며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비롯하여 많은 시가와 가사(歌辭)를 지었다. 송강정 옆면에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 명옥헌
조성 연대는 17세기로 담양지역의 소쇄원이나 식영정 같은 원림보다는 상당히 늦은 시기에 지어졌다. 그러나 그 구조의 독창성으로 소쇄원과 더불어 호남을 대표하는 원림으로 이름이 높다. 소쇄원은 계곡 속에 숨어있는 듯한 그리하여 비교적 자연에 대해 낮은 자세를 취하는 원림이라면 명옥헌은 인공연못과 섬을 조성하고 배롱나무를 정원수로 식재하여 우리 고전 건축에서 보기 드물게 인공이 많이 가미된 원림이라 할 수 있겠다. 명옥헌 정원의 장관은 정자에서 바라다보이는 연못 일대의 경치이다. 연못 둘레에는 적송과 목백일홍 등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데 여름이 되면 백일홍 꽃이 일시에 피어나 마치 도연명이 말한 무릉도원경을 연상케 한다. 무릉도원은 원래 복숭아나무와 관련되어 있지만 선경은 복숭아나무뿐 아니라 배롱나무와 도 관계가 있다. 배롱나무의 본디 이름이 자미목(紫薇木)인데 자미라는 것은 도교 선계의 하나인 자미탄과 관련이 있다고 할수 있다. 따라서 자미목이 울창한 명옥헌 정원은 도교의 선계요 이상향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어서 명옥헌 뒤에 이 지방의 이름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던 도장사(道藏祠)의 터만 남아 있다. 건물에는 명옥헌 계축이라는 현판과 정자 안을 보면 '三顧' 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삼고'는 인조가 반정 직전에 뜻을 규합하기 위해 세상을 돌때 유비가 제갈공명의 초가를 세번 찾아갔듯이 이곳에 사는 오희도를 자신도 세번 찾아갔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건물 입구에서 왼쪽으로 끼고 돌아 개울을 타고 오르면 조그마한 바위 벽면에 명옥헌 계축 (鳴玉軒 癸丑)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鳴玉軒癸西'라는 음각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것 이라고 전한다.
■ 개선사지석등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화강암으로 만든 것으로 석등의 제작기원이 표기되어져 있다. 석등이 있던 일대는 많은 사찰이 자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절터는 찾아 볼 수 없고 광주호에 묻혀버린것 같다. 오랫동안 파묻혀 있었는데, 최근에 바닥을 파고 흩어진 부분을 정리하여 시멘트로 바닥을 짠 다음 다시 세웠다. 높이 3.5m로,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 모양이 새겨졌고, 사잇기둥은 장고모양이며,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모양을 새겼다. 불을 밝히는 곳인 화사석(火舍石)은 8각이며 창이 8면에 뚫렸다. 지붕돌은 아랫면에 낮고 널찍한 괴임이 있고, 8각의 끝부분에는 꽃모양을 둥글게 조각하였다. 석등의 창 사이 공간에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5년(891)에 만들었다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글씨를 새긴 유일한 예로, 비슷한 시대의 다른 작품의 연대와 특징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표준이 되는 작품이다. 석등 기둥에 새겨진 조등기는 각기 두줄로 글을 새겨 놓았다. 글은 1행부터 6행까지는 경문왕과 왕비, 공주에 관한 기록이고 7행부터 10행까지는 사찰 승려가 석등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의 구입과 토지의 위치등이 기록되어져 있으며, 연호가 융기3년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학자들은 대순2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 독수정원림(전라남도기념물 제61호)
고려말 전신민(全新民)이 세운 것으로 1390년 전후로 추정된다. 전신민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당하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 72현과 함께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여 이곳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지었다.
이 정자의 창건은 전신민의 아들에 의해서 되었다고도 하나, 전신민의 은둔처에 연유하여 창건된 사실은 틀림이 없다. 정자의 이름은 이백의 시에 나오는 귀절에서 따온 것으로 은사의 고결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 정자가 퇴락함에 1891년(고종28)에 후손들이 중건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였고, 다시 1913년에 재차 중수하였고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추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꾸었다. 정자 안에는 이와 같은 전말을 기록한 중건기 및 상량문, 그리고 싯구 등의 현판이 있다.
전신민은 계곡물이 흐르는 남쪽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독수정이라 불렀으며, 후원에는 소나무를 심고 앞쪽에는 대나무를 심어 수절을 다짐했다. 독수정의 좌향은 북향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침마다 임금님이 계신 북쪽, 송도를 향하여 곡배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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