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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몫의 산행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누가 대신 가 줄 수도 없고 업어다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피곤해도 일어서야 한다.
힘들어도 가야만 한다.
천리 길이 한 걸음에서 시작되듯 만리 길도
한 발 한 발 걷는 결과일뿐이므로 인생 길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혜가 많다.
그러나 제법 큰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거기에 걸맞은 장비들이 필요하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서는 지혜로 무장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를 때는 힘만 뒷받침 되면 충분하지만 내리막에서는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대목이 나온다. 뜻을 이룬 자가 절정에 올랐을 때 더욱 삼가고
조심하라는 가르침이다.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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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아니면 숫자를 세는 것도 도움이 된다.
한 발 한 발 숫자를 세면서 열 걸음마다, 혹은 백 걸음마다
짧게 쉬어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된다.
목표를 작게 세우면 그만큼 달성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곤 했다.
아마도 힘들다는 생각을 잊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산에 오르면서 노동요가 생겨난 유래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갈 수 있다. 남의 보폭 에 맞추거나 누구의 속도를 따르면
쉬 피곤해 질뿐만 아니라 산에서 맛 볼 수 있는 즐거움이
다 달아나게 마련이다.
갖는 일이 중요한 까닭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뱁새에게 황새 걸음을 걷지 말라는 교훈은 그래서 만들어
졌으리라.
그래서 힘들어 보이는 길일지라도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대한 통계는 우리에게 생각할 과제를 던져 준다.
거는 대신에 그것들로부터 도망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부상이 두려워 스케이트를 배우지 않았다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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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도 지름길은 있다. 그러나 인생에도 왕도는 없다.
때문이다.
누구의 줄을 타고 손쉽게 출세를 하거나, 누구의 후광으로
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본인의 마음은 떳떳할까?
마치 헬기를 타고 정상에 내린 등산객처럼 멋적지 않겠는가.
마실 물은 줄어들고, 산소는 부족해진다. 모든 어려움이
함께 머무는 곳 그곳이 바로 정상이다.
인생에서도 무엇인가를 이루기 직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해 고백한 얘기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행여
우리가 정말 어렵고 힘든 지경을 만나면 그 것이 인생의
정점에 가까워졌다는 신호로 받아 들일 필요가 있다.
산행의 조력자, 함께할 동반자를 미리 준비한다.
무턱대고 오른다. 산에서 사고를 당하는 경우는
대부분 무모한 출발 때문이다.
인생 길에 계획과 준비가 필요함은 재론할 여지가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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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에 포기하여 탈락하는 사람도 있고,
가기로 약속했다가 애초에 불참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인생 길에서도 백 년을 함께 하자든지 혹은
도원의 결의와 같은 우정을 약속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사람들은 자주 잊어버린 나머지 지키지 못할 약속을
쉽게 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또 무슨 재미이겠는가. 계산과는 달리 의외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 세상살이요 산행이기도 하다.
거래를 할 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우정과 사랑에도 계산은
배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결과가 항상 계산한 대로 나오던가?
버거운 존재다.
오르는 사람이나 그 나름 대로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능력 있는 사람에게나 능력 없는 사람에게나,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인생길이 비슷하게 어렵듯이. 그러므로
내 짐만 유독 무겁다는 생각을 버릴 수만 있다면 인생 길의
불행을 꽤 많이 덜 수 있을 것이다.
이라서 사람들이 그것을 이야기할수록 불행은 점점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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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한다.그러다가 산을 내려오는 것은 거의가 비슷한 시각의
일이다. 직장생활에서도 이런 현상은 자주 나타난다.
사람이 다시 앞으로 나가는 일도 허다하다.
그러나 이들이 직장을 떠나는 것은 거의가 비슷한 시기의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을 떠날 때 보면 생전의 앞섬과 뒷섬의
선후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된다.
이미 초반을 쉽게 보냈다는 증거가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산리에서 출발하여 천왕봉을 오르는 사람이나 노고단을
출발점으로 하여 천왕봉으로 가는 사람에게나 지리산 종주는
똑 같은 어려움을 준다. 다만 어느 한 쪽이 초반에는 쉬웠을 뿐이다.
새삼 빛을 발하는 법칙이다.
있는데 이때 상대적으로 시간은 더 걸리게 마련이다.
힘을 덜 게 하기 위해서는 걸음을 더 많이 옮겨야 하고
시간은 더 걸리게 된다.
오르기까지 더 많은 걸음을 걸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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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도무지 아득하기만 하다.
왔단 말인가?
가장 힘든 순간을 데드 포인트(dead point)라 이름 할 수 있는데,
이 데드 포인트를 이기고 나면 사람들은 그 고통의 순간을 기억
저편으로 묻어둔 채 발길을 재촉한다.
내려오거나 혹은 원래 가려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사랑하는 아들을 산으로 보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있었노라는 가르침도 함께 묶어서.
18. 가는 길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산행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들은 속도를 낼 곳과 천천히 가야 할 곳을 구분하며,
힘을 쓸 지점과 힘을 아낄 지점을 분별하므로 힘을 안배할
수가 있다. 그래서 처음 가는 산행에는 경험 많은 안내자가
소중하다.
가리켜 선지식(善知識)이라고 불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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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걱정을 앞 당겨서 치르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앉아서 걱정만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뚜벅뚜벅 산길을 오르는 것 외에 달리 무슨 묘안이 있겠는가?
어려운 코스에는 한꺼번에 여러 학점이 주어 지기도 한다.
인생의 도에 이르는 일도 결국은 학점 따는 공부의 연속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공부의 연속이라고.
이 말도 어쩌면 산길을 오가며 얻어진 깨달음의 결과가 아닐는지.
먼 곳에서 보면 그게 그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산에도 길이 있다.
어떤 산을 몇 번이나 오르면 길눈이 트일까?
동네 길이 훤한 사람도 산길은 어두울 수가 있고,
산길에 밝다고 해서 인생길까지 훤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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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정서로는 구도와 수양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적어도 동양인들에게 산은 정복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산을 어떻게 정복한단 말인가. 산은 자연일 뿐인데.
대체로 높은 곳에 오른 사람들은 이렇듯 산 입구에서부터
몸을 자주 굽혔던 사람들이다.
이런 굴신력이 아니고는 높은 곳에 이르지 못한다.
높으면 높을수록 굽힘도 커져야만 하니까.
서로 마주칠 때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실감하게 된다.
헐떡거린다.
그러나 여유 있는 하산 길 이전에 이미 힘든 등산길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남의 입장을 생각하는 훈련장으로 산행 이상 좋은 도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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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사를 하지 않는 두 가지 경우도 있다.
여유가 없어졌거나.
산에서 느끼는 생명에의 외경심이라면,
산에서 느끼는 만큼만 사람의 귀함을 실생활에서 적용한다면
세상의 모습이 얼마나 좋을까.
산에서는 구도자를 닮아 있던 사람들도 하산하면
그 모습이 흐트러짐은 어떤 조화일까.
교회당이나 성당이나 법당에서 만난 사람들이
모두 성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가
세상에 나가면 다른 얼굴이 되는 것처럼.
대체로 올라갈때의 짐은 꽉 찰 만큼 많아서 묵직한 무게를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 재 두 재 넘으면서 짐은 조금씩 줄어든다.
하산하여 산의 발 뿌리를 벗어날 무렵이면 대부분의 배낭은 텅텅 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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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이나 동등은 등위가 존재함을 전제로 모두가 똑 같은 등위라고 주장하는 반면,
무등은 처음부터 등위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산에 가면 등위가 없고 산만 있을 뿐이다.
깊은 계곡, 사나운 맹수도 아니다.
역시 허기와 한기가 아닐까. 이 허기와 한기를 빼고 어떻게 인생을 말할 수 있을까?
허기와 한기만 이길 수 있다면 산길이나 인생길이나 모두 가볼만하다.
라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 때 그 고통은 예삿일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는 병을 인생의 네 가지 고통 중 하나로 꼽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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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분이 부족하여 탈수증이 생기면 생명은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
좋은 산은 마실 수 있는 좋은 물이 넉넉 한 산을 일컫는다.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퇴보와 몰락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모든 문명의 영고성쇠를 응전과 도전의 관계로 풀이한 역사 학자 토인비는
그래서 산길에서 자주 생각하게 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잘못된 이정표 때문에 고생해본 적이 있는가?
잘못된 정보는 산행을 훨씬 힘들게 만들고 심한 경우 산행을 아예 망치게도 한다.
정말 인생의 도움이 되는 안내자를 가지고 있는가?
출처 :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글쓴이 : 화정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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