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위계는 뚜렷해서 국왕과 가장 가까이 지내는 지밀이 최상급 부서다.
지밀의 수석상궁은 궁녀 전체의 장인 것은 물론, 조정대신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위세가 지엄하다.
궁녀는 대개 4,5살 때 입궁한다.
간혹 열살 넘어 입궁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때는 궁중 의녀가 앵무새의 생피를 팔목에 발라 처녀성을 감별한다.
피가 묻어나야 처녀라는 데....
어린 딸을 입궁시킨 부모는 빨래감을 내가고 버선을 넣어주는 등 일체의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
이후 각 상궁이나 내인들에게 맡겨져 그들의 자식처럼 자라고 교육받는다. 일생 아이를 낳지 못하는 궁녀들로서는 양자를 들인셈.
입궁 후 15년 정도 지나면 관례를 치르는데 이는 성년식이자 신랑 없는 결혼식이다. 이후 마음이 맞는 두 궁녀가 짝을 이뤄 외로움을 달래며 한방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 국왕이 손길이 닿게 되면 더 이상 궁녀가 아니라 내명부(일명 후궁)로 승격되고 종4품 숙원에서 정1품 빈까지 품계가 내려진다.
*조선시대의 내명부
품계 |
정1품 |
종1품 |
정2품 |
종2품 |
정3품 |
종3품 |
정4품 |
종4품 |
명칭 |
빈
嬪 |
귀인
貴人 |
소의
昭儀 |
숙의
淑儀 |
소용
昭容 |
숙용
淑容 |
소원
昭媛 |
숙원
淑媛 |
이것이 궁녀들 일생의 꿈이지만 정말 꿈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 그러다보니 극히 일부지만 이들 사이에 '대식'이라고 하는 동성애가 행해지기도 한다는 후문.
궁녀는 궁궐에서 일생을 마치지 않는다. 늙고 병들게 되면 궁을 나가 본가로 돌아가야 한다.
러나 집으로 돌아가도 한번 궁녀는 영원한 궁녀, 혼인을 해서도 안되고 첩이 돼서도 안된다.
궁궐에서 자라나 궁궐에서 핀 꽃, 궁녀들, 비록 궁궐 밖 보이지 않는 곳에서 외로이 지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궁궐을 향해야 한다.
<> 사적 제149호,칠궁
이곳은 조선시대 일곱 후궁의 신주를 모신곳이다
비록 정실 왕비는 되지 못했지만 자신이 낳은 아들이
왕이 됐던 여인들 그들은 궁녀였다
조선시대 궁녀는 전문직이었다
칠궁 사당
이 칠궁은 궁녀에 관한 얘기가 깃들여 있는 곳이다.
궁녀하면 아마도 왕의 승은을 입기 위해
암투와 시기를 벌이는 모습이거나 아니면 왕과 왕비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이 궁녀들은 언제부터 있었던 것일까?
* 삼국시대
백제 의자왕과 삼천 궁녀의 전설은 -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얘기이다.
-세종실록 책 표지내용 한문으로 나온다
세종실록에 그 전설이 기록을 보면
'의자왕이 신라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들이 이 바위로
달아나 스스로 강물에 떨어져 죽었으므로 낙화대라
하였다'
이 기록으로 볼 때 삼천궁녀는 과장이라 하더라도
삼국시대에 궁녀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고려시대
본격적인 궁녀제는 고려시대때 시작됐다고 한다.
그것을 이어 조선시대 초기에 구체적인 규정과 체제를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이때 정비된 궁녀제는 조선말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궁녀의 범위
궁녀란 좁게는 상궁과 내인을 말하고
넓게는 무수리나 비자같은 하녀들까지 포함된다.
그렇다면 궁녀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는 어디였을까?
그리고 궁녀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바로 이 칠궁안에 그들이 있다 *
칠궁이란 무엇인가?
- 그곳엔 궁녀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이들이 있다
서울 궁정동, 청와대 경내 -
평소 굳게 닫혀 있는 이 문을
들어서면 오래된 재실을 볼 수 있다
이곳엔 7개의 사당이 있는데 후궁이 낳은
왕들이 자신들의 생모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7궁의 위패
그렇다면 이 위패의 주인들은 누구일까
-정빈이씨 진종 생모위패
추존된 왕 진종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
장희빈으로 더 유명한 경종의 생모 희빈 장씨-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
비운의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 엄씨가
그 주인들이다.
이중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명은 궁녀 출신이다.
홍교수 "후궁 어머니가 꼭 왕비이지 않은 왕들도 상당
히 있다 그런 왕들의 생모는 절대로
종묘에는 들어갈 수 없으나 그렇다고 일반
사당하고 똑같이 모실 수 없기 때문에 격을
높여서 궁자를 붙여서 서울의 여기저기에 그런
사당들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중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는 무수리로
궁녀 중 가장 비천한 신분이었다
육상궁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생모에 대한 효심과
열등 의식으로 직위초부터 숙빈최씨의 묘를
능으로 만들길 원했다
홍교수 "영조는 자기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이 미천
하다는데에 대해서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기 때문에
영조는 왕이 되던 그 이듬해 원년에 이곳 사당
을 짓고 육상묘라고 하였다 왕의 사친이지만
바로 궁이라고 붙이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냉천전 사당 냉천정에는 영조의 어진이 보관돼 있었다
영조는 그 어떤 곳보다 이곳을 자주 들렀다고
한다.영조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정이
깃들어 있다
사당,덕안궁 원래 육상궁을 제외한 나머지 사당은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1908년 각 사당을 이곳에 모아 육궁이라고
불렀고 1929년 순헌귀비 엄씨의 사당이
옮겨 오면서 칠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위패 칠궁에 모셔진 여섯명의 왕의 생모들
그들은 궁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조선전기 임금들은 주로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되자 이후 3백년간은
창덕궁이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치르는
역사의 주무대가 되었다.
왕과 왕비 왕족의 생활공간
동궐도
이것은 1820년대 조선 후기에 그려진 창덕궁의 모습
인데요,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은 주로 어디서
생활하였을까?.
왕과 왕비의 일상적인 생활 공간을 내전이라고 하는데요,
궁궐의 뒷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희정당
이곳 희정당은 원래는 왕의 침전이었으나, 순조이후로는 왕이
공식활동을 하는 곳인 편전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대조전
이 희정당 뒤편, 구중 궁궐 가장 깊은 곳에
왕비가 기거하고 생활하던 공간이 있다. 대조전이다.
왕과 왕비가 동침하는 침전이 바로 이곳에 있다.
왕과 왕비의 생활 공간인 내전의 동편에는 세자의 활동
공간인 동궁이 있었다. 서편 뒤쪽으로는 왕대비전이 있었다고 한다.
궁녀의 공간과 할 일
그렇다면 궁녀들도 이 일대 어디에선가에서 생활하며 자신들이 맡은 일을
했을 텐데요, 궁녀들은 이 넓디넓은 궁궐안 어디서-
과연 어떤 일을 했던 것일까 *
궁녀의 임무 하는일(독특한 일 중심)
-체계적이었으며 월급까지 받았다
궁궐 외경
각각의 전각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창덕궁
인정전
왕과 신하가 만나 의논하고 정사를 보는
집무 공간 뿐 아나라 왕과 그의 가족이 생활
하는 전각들이 모여 있다
왕과 왕비 그리고 왕족들은 궁궐내에서 각각의
전각에서 따로 독립세대를 이루며 생활했다.
대조전
따라서 대전 중궁전 동궁전 대비전 등의
궁녀들 또한 각각 따로 뽑았다.
그렇다면 궁녀들의 주된 근무 공간은
어디였을까,
조선시대 후기에 그려진 궁궐의 평면도인
동궐도형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동궐도형에는 소주방이라고 하는 곳이 여러
군데 보여서 임금의 수라상을 마련하거나
아니면 궐내의 잔치때 잔치 음식을 마련하는
곳들이 많이 분포돼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궁녀의 일
궁녀들은 주로 의식주에 관계된 일을 주어진
역할에 따라 분담해서 일했다.
수라간
아침, 저녁 수라와 잔치 음식 등을 준비하는
일은 궁녀들이 맡은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다.
이강근 교수 "이자리는 왕과 왕비의 침전이었던 그
대조전의 서쪽 행각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원래 임금님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소주방이있던 자리이다.
그런데 1917년 외정때에
불타고 나서 다시 지으면서 서양식으로
개조돼 있기는 하나 여전히 임금님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곳이었고 그 수라상을 마련하던 궁중
나인들이 주무시던 곳이 바로 이옆에 있는 방
온돌방이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대조전
대조전은 창덕궁에서 가장 내밀한 왕비의
생활 공간이다
왕과 왕비가 잠을 자는 대조전의 침전에
궁녀들의 특별한 업무가 있다
왼쪽 방문열리고 들어가면
중앙의 큰방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고
그 둘레에는 여러개의 작은 방이 있다.
침전을 둘러싸고 있는 이 작은 방에서
궁녀들은 숙직을 섰던 것이다.
각각의 작은 방에 한명씩 들어가 숙직을
섰는데 그곳에 이부자리를 두지 않았다.
왕과 왕비가 함께 잘때는 노상궁들이 숙직을
섰고 젊은 궁녀들의 접근은 금지됐다
숙직과 부서
1. 지밀
이 숙직은 지밀에서 했다
지밀이란 말 그대로 가장 지엄하고 중요하여
말한마디 새어 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과 안사랑 대청등이
있는 곳에서 근무하며 왕과 왕비를 보필하는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맡은 핵심 부서가
지밀이다
2. 침방
왕과 왕비의 옷, 이부자리 등을 만드는 부서이다.
3. 수방
의복과 장식물에 쓰이는 수를 놓는 부서이다.
4. 생과방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곳인 생과방이 있다.
5. 세수간
세수간에선 세숫물과 목욕물을 준비하는 일을 전담한다. 내전 청소도 이들의 임무다
6. 세답방
빨래와 그 뒷손질을 담당하는 세답방까지 궁녀들은 각 부서별로 일했다.
"침전 일과 주변에 주로 수라간을 중심으로 해
서 침방이라든지 수방이라든지 또 생과방
이라든지 하는 궁녀들의 작업실들이 배치돼
있었던 것으로 된다"
궁녀의 수는 얼마나 될까
영조때 이익의 성호사설에 궁녀는
육백팔십사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종 실록에도 궁녀의 수를 적어 놓은
기록이 있다
대전에서 세손빈궁 시녀수12
대전 및 각전궁의 궁녀는 다 합해서 480명-
이들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궁녀는 5백명에서
6백명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전회통
대전 회통에 의하면 '궁녀란 궁중 여관의 별칭
으로 상궁이하의 궁인직' 이것은 즉
궁녀란 궁중에서 일하는 여성 관리라는 뜻이다
궁녀도 직급이 있었던 것일까
궁녀들은 맡은 일에 따라 품계가 나눠져
있었다. 경국대전에 그에 대한 기록이 있다.
"궁녀와 후궁을 포함한 궁궐에서 근무하는
여성들을 내명부라고 했다"
정1품 빈이하로부터 종4품 숙원까지는 국왕의
여자로 후궁을 말하며,
궁녀는 정5품에서 종9품까지 10등급으로
나뉘며 그 업무에 따라 품계가 달랐다
신명호 교수 "정5품이면 양반 관리하고 비교한다면 참판
밑에쯤 되는 상당한 고위 관리는 아니지만
중견 실무자라로서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라고 할 수 있다"
월급 지급
궁녀들이 관리였다면 녹봉을 받았을 것이다
태조실록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궁녀들은 매월 정기적인 보수로 쌀 세말
그외 옷감 등도 특별히 하사 받았다.
1896에 쓰여진 궁중예산서가 바로 그것이다
여관봉급- 이백사십원.
대전 소속 궁녀들에게 지급할 봉급 총액이다
이때 궁녀들은 돈으로 월급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월급 명세서
궁녀들의 봉급은 어느 정도나 됐을까
우리는 앞의 자료와 연구 논문를 근거로
순종때 지급됐던 궁녀들의 월급 명세서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발권정책팀 당시 가장 높은 보수였던 196원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
당시 경제 상황이 고려돼야 하기 때문에
화폐 자체로는 과거와 현재 돈의 가치를 정확히 환산할 수는 없다.
-쌀가격추이 책 우리는 1926년의 80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쌀가격과 현재의 쌀가격을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쌀가격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그당시 1920년
대 당시는 20원 했다 99년말 현재 15만9천원 상회했기
때문에 그것을 기준으로 했을 때
1926년에 196원은 오늘날 150만원을 상회 한다고 할 수 있겠다"
-궁내부비예산 명세서 궁녀들은 맡은 업무와 연차에 따라 월급이
달랐고 품계에 따라 월급이 차등 지급됐다
-이배용 교수 "실제로 궁녀는 조선왕조에서 정식으로 월급을
받는 소위 여성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들을 전문직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려서부터 궁궐에 들어와서 자기가 맡은 일을
평생토록 하는데 특히 왕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준 높고 체계있는 자기의 전문
영역을 개발할 수 있게 되는거다."
-서류 여관 봉급 궁녀-그들은 국가에서 월급을 지급 받았던
공무원이었으며 전문직 여성들이었다
여성에겐 관직의 길이 열려 있지 않았던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궁녀가 여성 관리였다는 사실은 잘 모르셨을 거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도청의궤의 반차도
왕비를 따르는 수많은 행렬 중에 여기 궁녀들의 행렬도 보인다.
기행 내인
- 말 그대로 말을 타고 가는 궁녀라고 써 있다..
가례때 입는 장삼을 입었다.
보행내인
그 뒤를 따라서 걸어 가는 이들은 보행내인입니다.말을 타지 않고 걸어
가는 것으로 보아 직위가 좀 낮은 듯 보인다.
상궁
장삼을 입고 말을 타고 가는 이 사람은 상궁이다.
장삼은 보행내인 이하는 입을 수가 없었다.
이걸로 봐서 궁녀도 계급과 직위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여성 관리인 궁녀가 되는 길
궁녀의 선출과 교육
각 부서별로 그 나이가 달랐다
지밀
4,5세,침방과 수방은 7,8세 그외 부서는 13세 미만으로 궁녀는 어린 나이에 뽑혀 들어왔다
-김용숙 교수 "지밀은 왕의 눈에 닿기도 쉬운 자리고 제일
대표 그러니까 교양도 어느면에서는 왕자 왕녀
못지 않게 4살부터 들어와서 말 익힐때부터
후천적인 준비라고 할까 궁중에서 길러지는
것이니까 품격이나 관습이나 못든 행동이나
이런 것들이 궁중화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것"
궁녀의 출신 성분은 어떠했을까
예종때 궁녀의 신분에 관한 기록이 있다
한명회는 '양반 관료 첩의 딸과 양인의
딸을 뽑자'고 했고
신숙주는 '그때그때 임시로 선택하고 법을 미리
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 효종때엔 궁녀를 양가의
딸 중에서 뽑았다
-이배용 교수 "조선초기에는 관청의 여자 종을 선발하기도
하고 기첩 소생이 궁녀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런데 점차로 시기가 흐르면서 양가집의
규수들이 궁궐로 선발돼서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게 나타나고 그러다 보니까 민간에서
일찍이 궁녀로 뽑히지 않기 위해서 조혼을
하는 풍습도 생겨나고 그랬다"
궁에서는 되도록이면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길 원했지만 폐단이 생기자 영조는 양가의
딸을 궁녀로 뽑지 못하게 법으로 명문화시켰다.
-김용숙 교수 "상사람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서울에 있는 공상 계급에서 들어왔고 침방
까지는 중인 계급을 썼다는 것이다."
궁녀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절차
궁녀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가 있다. 처녀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팔에 앵무새 피
이것은 12,13세의 당시로서는 성숙한 나이의
경우에만 실시하던 것으로
앵무새의 피 한방울을 팔에 떨어뜨려 피가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해서 탈락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