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들은 아버지 친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나게 되며
이 사람이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일당스님이며 이름이 “김태신”이다.
일당스님은 지금도 김천의 직지사에서 활동 중이며 해방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김일성 종합대학에 지금도 걸려있다 한다.
당시 그 일로해서 조총련계로 오해받아 작품 활동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다 세이조와의사랑도 아픔으로 겪은 그녀는 곧, 일본에서 돌아와 수덕사의 여승이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이 세파에 으스러지는 아픔을 이겨내고,
또 다른 참 인생의 행로를 불자의 길로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린 아들이 수덕사를 찾아 왔는데 불자가 되었으니,
“속세에 맺어진 너와나의 모자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므로
더 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 하며
모질게도 모자의 정을 끊고자 이역만리 찾아온 어린자식을 절 밖에 재웠다 한다.
이때 김일엽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같이 지내며
어머니 처럼 자신의 젖가슴도 만져보게 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가슴에 쌓여 해탈로 녹아내렸을까 ?
비구니로써 그의 인생이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길 만큼 성공적인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
가수이자 음성 포교사인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 송춘희씨를 기념하기위하여
절 앞에 있는 주차장에 노래 기념비를 세웠으나
2-3일후 수덕사의 스님들이 이 기념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그 연유는 아마도 노래의 가사 내용이 스님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 해도 중생을 구제하고 아픔을 함께 해야하는 스님들께서 속세의 작은 정표하나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하는 처사가 못내 아쉽기만 한 것은 내가 불자가 아니어서 그런걸까 ?
일엽 스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기념비는 어찌 되었을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무심히 부르고 흘러버릴 대중가요일 뿐인 “수덕사의 여승”에 이렇게 딴지를 걸어 보는건,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가 60년대이니 이때엔 일엽스님께서 수덕사에 살아 계실 때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노랫말을 쓴이가 일엽스님의 인생을 안다면
아마도 그런 가사가 나왔음 직 하지 않은가.
이 글에 인용된 사실적 기록들은 일엽 스님의 아들 일당스님(김태신)이
최근 발표한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에서 발췌했음을 밝혀 둔다.
<옮긴 글>
수덕사의 여승/김문응 작/한동훈 곡 (66년)
인적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산길 백리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염불하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맺은 사랑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1966년도에 나온 송춘희(1937~ )의 노래 ‘수덕사의 여승’은 대단히 히트하여
10년의 무명가수인 송춘희를 그해 10대 가수에 올려 놓았다. 송춘희의 출세곡이자 평생 간판곡이 되었다.
수덕사의 여승’은 불교를 떠올리는 대중가요로는 가장 대표적인 곡이자 간판곡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중 장년층에서는 많이 애창되고 있다.
대중가요는 세월이 지나면 대체로 잊혀져 가는 것이 보통인데도 그만큼 롱런하고 있는 셈이다.
당시의 폭발적인 인기나 지속적으로 인기를 유지하게 된 데에는 노래 가사가 전달하 듯,
속세에 두고온 님을 잊지 못하고 흐느끼는 여승의 애절한 모습에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수덕사 여승에 대한 관심과 궁금증. 무슨 사연이 있을까?-- 참 여운이 많다
수덕사에는 여승이 있고 청도 운문사와 더불어 대표적인 여승의 수행도량 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