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시 모음> 김길남의 ´등산계명´ 외
+ 등산계명
5월이다
멀리서 여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산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얼마나 흐뭇한 현상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한때의
유행성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무슨 놀이의 일종이나
아베크족 따위를 위해서 선택된
어떤 사치한 방법이 아니기를 원한다
봄이 충만한 산에 올라
봄의 정취를 맛보며
멀리서 찾아오는 여름을
기다리며
산의 엄숙, 정결, 자비,
대자연과 인생에 대한
계시와 교훈을 배우기로 하자
(김길남·시인,
1942-)
+ 등산
바람이다.
소금기 하나 없는 산바람, 신바람이다.
정상은 언제나
내 마음을 흔드는
팽팽한 그녀의 앞가슴
눈을 감을수록
사방은 황홀하게 피었다 지는
이름 모를 풀꽃 향기들의
수화.
문득 칡넝쿨이 몰고 오는 벼랑 아래로
폭포다.
뿌리 깊이 묻혀 있던
원시의 야성을 깡그리
일깨우는......
나는 더 이상
두 발로 걷는 인간일 수 없다.
돌이거나 나무이거나 산짐승이거나
숨이 벅찰
무렵부터
나는 이미 산의 일부로
치환되고 있는 것이리라.
(임두고·시인, 1960-)
+ 등산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
확고한
가장 철저한 믿음도
한때는 흔들린다
암벽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 않는
무명(無明)의 벌레처럼 무명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보지도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한다
행복이라든가 불행 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오세영·시인,
1942-)
+ 등산
오르는 것이 아니네
내려오는 것이네
굽이굽이, 두고 온 사연만큼
해거름 길어지는 산 그리메
막소주 몇 잔, 목젖 쩌르르 삼키듯
그렇게 마시는 것이네
거기 묵김치 같은 인생 몇 쪽
우적우적 씹는 것이네
지나 보면 세상사 다 그립듯
돌아 보이는 능선길
그게 즐거움이거든
(권경업·시인,
1954-)
+ 등산
오른다.
탑보다 높이
빌딩보다도 높이
오를수록
가벼워지는
육신
정상
천국행 정류장에서
셔틀바람 타고
희열 만끽한다.
(강신갑·시인,
1958-)
+ 등산
산을 오름은
세속을 멀리하고자 함이다
더 높이 오르고자 함은
보다
멀리 바라보고자 함이다
어려운 고개도,
험난한 구빗길도
묵묵히 걸으며
자신과 말없이 씨름한다
새
소리, 바람 소리에도
새 힘이 솟는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의 먼지를 모두 씻어낸다
그래서 내 몸도 내 마음도
어느 사이 초록 빛깔이 된다
반드시 정상이 아니라도 좋다
종주거나 횡단인들 누가 탓하랴
산 속에서 산의
정기를 받고
산의 호연지기를 배워
인생을 성실하게, 겸손하게
그래서 모든 세상사를 순탄하게
이끈다면
여기에
무엇을 더 바라랴
산을 오름은
교만을 버리려 함이다
인내를 배우고자 함이다
보다 넓은 마음을 가지고자 함이다
마침내는
산을 닮아
산과 내가 하나 되고자 함이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登山등산
내가 산을 오른다.
이밥일래 보리밥일래
풀 여름을 까고 노는
아이들의 냇둑
들판도 지나서
산을
오르고 있다.
사람들이 모르는 오솔길
샘솟는 물을 마시면서
꽁지를 까딱이면서 나는 새들
찌르레기 소리조차 산을
흔드는
오존 그득한 오솔길.
길이 아닌 데로 오르다가
가시덩굴에 긁힌 사람
때로는 넘어지고 절뚝거리면서
숲 속으로 뻗쳐 내리는
햇살의 건강으로 회복되면서
또 오르고 오르는 산
집들이 점점 멀어져 간다.
세상은 약 떨어진 아편쟁이처럼
발아래 다소곳이 엎드려 있고
머리 위에 빛나는 태양
하늘이 거기 있다.
우두자국처럼 떠 있는 흰 구름
하늘이 나를 부르고 있다.
(최진연·시인, 경북 예천 출생)
+
등산
한 발 한 발 무거운 발걸음
자국마다 살아온 생각 밟고
올라온 능선을 뒤따라온
바람이 솔잎 흔들어
지우는데
가슴 열어 침묵하고 앉은 산아
옹이져 맺힌 삶
너의 품에 안겨서야
헐떡이며 가빠오는 숨 내쉬고
평정을 되찾는다
이제까지 지고 온 무거운 고달픔
산아래 내려놓고 정상에 올라
숲 속 풀내음에 고단함을
씻어내려
마음 속 비워놓고 앉아 있는데
하얗게 산허리에서 피어오르던 안개
산은 하늘이 되어
나는 구름 타고
앉은 신선이 되었구나
(박옥하·시인)
+ 등산
고요가 좋아
푸름이 좋아
(그래 바위도
좋아)
그저 그냥
자꾸만 위로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어디서부턴가
어디론가
길이 있었다...
한 걸음도 좋고
반걸음도 좋았다
오르고 또 올라가면서
한 개씩
반 개씩
씁쓸한 삶의 기억들을
버려가면서
시간이 어디선가 주저앉아 쉬고 있어도
그저 올라가면서
나를 잊어가면서...
구우구 어디선가
산비둘기 울고
까아까 어디선가 산까치도 날고
어디선가 향긋이 꽃내음이 불었다. 아주 진하게
아아 산이었다. 산이
있었다
푸르고 고요한 산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시간은 어디로 갔지?
나는 어디로 갔지?
그저 웃는다...
어느 날인지
하늘은 티없이 맑은데
오직
산이 있었다
고요한
푸른
높이 솟은
과묵한 산이 하나 있었다
산이...
(이수정·시인)
+ 등산의 즐거움
산에 오르는
즐거움은 인생살이처럼
정상에만 있지 않다
어떻게 느끼며 오르내리느냐에 있다
먼저 마음을 가다듬고 겸손하고 조용한
자세로
말馬을 올라타야 한다
앙상하게 드러난 뿌리를 밟을 때
나무의 신음소리를 들어보고
나무 하나 바위 하나를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살결에서 생명체를 인식한다
나무들이 내뿜은 신선한 공기를 통째로 들이마시며
다람쥐와 산새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좋아하는 그들의 느낌을 나눠본다
계곡물을 보며 핏줄에 흐르는 피를 느껴보고
산오름 바람을 맞아 콧구멍을 크게
벌린다
맨발로 흙을 딛고 서서 나도 나무가 되어 본다
고요한 산의 침묵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산꽃들과 눈을 맞대어
보고
산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산이 된다
이것이 산에서 만든 나의 행복이다.
(차영섭·시인)
+
산을 오르며
우람한 산 앞에 서면
나의 존재는 얼마나 작은가!
겸허하게 살자고 다짐하면서도
가끔은 교만이
고개를 치켜드는
아직도 많이 설익은 나의 인생살이를
산은 말없이 가르쳐 주지.
높음과 깊음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
깊숙이 내려앉기 위해
가파르게 오르는 아름다운 삶의 길을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말없이 산은 내게
이야기하지.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그룹명 > 별과 詩가 있는 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나 하늘나라로 돌아 가리라 / 歸天 (0) | 2014.02.20 |
---|---|
[스크랩] 한해를 보내면서 올리는 기도 (0) | 2013.12.31 |
[스크랩] 등산-홍은숙 (0) | 2013.12.23 |
[스크랩] <산 시 모음> 신석정의 `산` 외 (0) | 2013.12.23 |
[스크랩] 산에서 만난 시 (0) | 2013.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