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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계에서 가장 많은 14좌 완등자 배출 국가로 우뚝

산술 2013. 7. 18. 17:24
[김창호 8,000m급 14좌 무산소 완등 특집 | 한국 히말라야 14좌 등반 약사] 세계에서 가장 많은 14좌 완등자 배출 국가로 우뚝
서성호 2개 봉 남기고 좌절, 안타까워

 ‘신들의 영역’이라 불리던 8,000m 고봉을 인간이 최초로 오른 것은 불과 60여 년 전인 1950년이다. 이후 8,000m 거봉에 대한 도전은 경쟁 양상을 띠게 되어 1986년 라인홀트 메스너가 14개의 8,000m 고봉을 모두 오르는 역사를 만들기에 이른다. 이탈리아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는 1970년 낭가파르바트를 시작으로 1986년 로체 등정까지 16년에 걸쳐 히말라야 14좌를 달성했다.



	한국의 대표적 8,000m 거봉 등반가들.
▲ 한국의 대표적 8,000m거봉 등반가들. 맨 앞부터 시계 방향으로 엄홍길, 고미영, 한왕용, 박영석, 오은선.

메스너 이후 지금까지 8,000m 14개 고봉에 모두 오른 이는 2013년 5월 19일 기준 총 30명이다. 이들 등정자 가운데 13명은 산소통을 이용하지 않고 무산소로 14개 봉을 올랐다.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박영석이 세계 여덟 번째로 14개 봉 완등에 성공했고, 같은 해 엄홍길이 세계 아홉 번째, 2003년 한왕용 대장이 세계 열한 번째로 14개 봉 완등에 성공했다. 2011년에는 김재수가 세계 27번째로 완등에 성공했으며 2013년 5월 20일 김창호가 세계 31번째로 성공했다. 김창호는 한국 최초 무산소 기록을 세웠으며 세계에서 14번째로 무산소 완등에 성공했다. 


김 대장의 무산소 14좌 완등은 2005년 7월 14일 낭가파르바트(8,156m) 루팔벽 등정을 시작으로 7년 10개월 6일 만에 일궈낸 성과다. 이는 기존 최단기간 등정자인 폴란드의 예지 쿠크츠카가 세운 7년 11개월 14일보다 1개월 8일 앞당긴 기록으로, 14개봉 등정 최단기간 갱신과 동시에 무산소 등정으로도 최단기간을 기록하게 되었다.


김창호 대장의 이번 성공으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14좌 완등자를 배출했다. 고 박영석, 엄홍길, 한왕용, 김재수에 이어 김창호는 한국 다섯 번째의 14좌 완등자다(오은선은 캉첸중가 등정 의혹). 한국과 이탈리아가 각각 5명으로 가장 많다.


한국 최초로 14좌를 완등한 박영석은 1993년 에베레스트 등정으로 긴 여정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 그의 등정은 아시아 최초의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8년 2개월 만에 14좌 완등, 세계 최초 1년간 8000m급 6개봉 등정 등의 대기록들을 수립했다. 박영석은 2004년 무보급 세계 최단기간 남극점 도달(44일)에 이어 2005년 북극점을 밟으며 인류 최초의 산악 그랜드슬램(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지구 3극점 정복)을 달성했다.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루트를 개척하는 쾌거도 올렸다. 그러나 2011년 안나푸르나 남벽에 신 루트를 내기 위해 등반하던 중 실종되었다.


엄홍길의 14좌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처음 도전했다가 실패했고, 이듬해 재도전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그러나 1988년 마침내 정상을 밟으며 14좌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5년간 벽 등반에 몰두하다가 1993년 다시 14좌로 방향을 틀었고, 초오유와 시샤팡마 정복으로 속도를 내 1997년까지 9개 봉우리를 넘어섰다. 그 과정에서 유독 진을 뺀 봉우리가 안나푸르나였다. 1950년 프랑스의 모리스 엘조그와 루이 라슈날에 의해 인류 최초로 정복된 8,000m급 봉우리지만, 20년이 지난 1970년에야 두 번째 등정이 이뤄졌을 만큼 까다로운 산이기도 했다.


엄홍길은 에베레스트에 오르자마자 안나푸르나를 다음 목표로 잡았다. 그러나 1989년 첫 도전과 1996년 두 번째 도전에서 거푸 기상악화로 물러났고, 1997년 봄에는 셰르파 나티가 크레바스에 빠져 사망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98년 봄에는 등반 도중 추락하는 대원을 구하려다 정강이뼈가 세 동강 나는 중상을 입었고, 다섯 번째 도전에 나선 1999년에야 간신히 정상을 밟을 수 있었다. 그의 14좌 완등에는 셰르파 4명, 대원 3명, 기자 1명 등 총 8명이 희생이 따랐다.


엄홍길은 2000년 한국 최초로 14좌 완등을 공식 발표했으나 등정의혹에 휘말려 2001년 로체와 시샤팡마에 재도전, 등정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박영석이 완등 순서에서 앞서게 되었다. 위키디피아와 에베레스트뉴스닷컴 등 권위 있는 외국 사이트들은 박영석 대장을 세계 8번째 완등자, 엄홍길 대장을 세계 9번째 완등자로 인정하고 있다.


오은선 캉첸중가 등정 여부 여전히 논란
한왕용은 1994년 초오유 정복을 시작으로 때로는 엄홍길과, 때로는 박영석과 호흡을 맞추며 봉우리 하나씩을 취한 끝에 10년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초반에는 박영석과 함께 등반하며 경력을 쌓다가 1998년 엄홍길과 더불어 안나푸르나를 올랐다. 또한 엄홍길의 고봉 완등 마무리 등반인 2000년 K2 원정에 동행, 등정을 이루었다. 한왕용은 7번째 봉인 낭가파르바트부터 박영석과 다른 독자적 행보를 시작했다. 한왕용은 박영석과 엄홍길보다 완등은 늦었지만 고봉 원정을 총 20회 나가 그중 14회 성공해 성공률로는 두 선배보다 앞선다.



	14좌 등정 기록과 완등자 리스트

김재수는 1990년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14좌 레이스에 시동을 걸었다. 2011년 안나푸르나 정상에 서며 21년 만에 완등을 한 셈이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14좌에 나선 것은 2007년이었으며 이후 4년간 무려 13개의 고봉을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1993년 단독으로 초오유를 올랐으나 등반허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해 공식발표를 하지 못했고, 정상사진으로 사실을 밝혀 등정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2007년 고 고미영의 등반매니저를 맡으면서부터 다시 히말라야 고봉에 도전했다. 이후 2009년 그녀가 낭가파르바트에서 사고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10개 봉우리를 함께 올랐다. 그중 에베레스트와 로체, 시샤팡마는 두 번째 등정이었다. 고미영 사고 이후 김재수는 그녀의 14개 봉 완등 목표를 대신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등반을 계속한다. 하지만 승승장구했던 그도 안나푸르나와 초오유에서 실패하며 등반의 어려움을 실감했다. 하지만 2010년 여름 시즌 가셔브룸 2봉과 가셔브룸 1봉의 연속 등정에 성공하며 이를 극복했고, 2011년 4월 26일 마침내 안나푸르나를 오르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위키디피아와 에베레스트뉴스닷컴 등 권위 있는 국제적인 소식통의 14좌 완등자 명단에서 빠졌지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오은선이다. 그녀는 1997년 가셔브룸2봉을 시작으로 13년에 걸쳐 14개 고봉에 도전했고 이중 13개 고봉의 등정을 인정받았다. 탁월한 고산 적응력을 지녔다고 평가되었던 그녀는 많은 8,000m급 고봉을 무산소로 올랐으며, 캠프를 줄이며 속공법으로 등정하여 주목을 받았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14좌 완등보다 15개월 사이에 8개 8,000m급 고봉에 올랐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며 오은선의 등반력을 찬탄했다고 한다.


특히 여성 최초 14좌 완등을 목표로 한국의 고 고미영을 비롯해 오스트리아의 겔린데 칼덴브루너, 스페인의 에드루네 파사반과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오은선은 2011년 안나푸르나를 오르며 세계 최초의 여성 14좌 완등자가 되는 듯했으나 2009년의 캉첸중가 등정의혹이 일파만파로 번지며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대한산악연맹이 국내의 안나푸르나 등정자들을 소집해 회의를 열어 검증한 결과, ‘오은선 캉첸중가 미등정’을 공식발표하면서 14좌 등정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세계적인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는 오은선을 14좌 완등자에서 제외해 ‘dispute(논란)’ 명단에 올려놓았다.


이 밖에도 14좌에 도전하고 있는 산악인들이 있다. 손가락 없는 산악인 김홍빈이 현재까지 8개의 고봉을 올랐다. 그는 2013년 5월 20일 캉첸중가를 오르며 지난해 7월 K2를 오른 데 이어 장애를 딛고 8,000m급 7개 봉을 등정했다. 그는 1991년 매킨리 단독등반에 나섰다가 동상에 걸려 열 손가락을 잘랐다.


한국 산악인의 14좌 도전사에는 영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 고미영의 죽음처럼 가슴 아픈 이들도 많다. 가장 최근의 아픔으로 지난 5월 21일 에베레스트 4캠프에서 사망한 부산 산악인 서성호(34)와 같은 날 캉첸중가에서 사망한 광주 산악인 박남수(47)를 들 수 있다. 서성호는 8,000m 14좌 중에 12개를 오른 젊은 산악인의 대표주자였다. 한국이 14좌 완등자를 세계에서 가장 많은 5명이나 배출할 수 있었던 데는 서성호와 박남수 같은 산악인들의 열정이 크게 기여했다. 서성호는 지난해 한 산악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2개를 오르며 생각의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처음에 친구들이 나이가 들며 결혼하고 집 사고 하는 것들이 부럽기도 했는데, 지금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지금 이렇게 차 마시고,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만족스럽습니다.” 

출처 : 복내남교 제9회 동창회
글쓴이 : 윤주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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