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고파
글 / 김영도 한국등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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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산에 갈 때 반드시 정상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등정을 성취로 여기지 않는다. 여기 대자연이 품고 있는 또 다른 의미를 찾을 때가 왔다.설악산 나한봉에서 바라본 1275봉과 범봉. |
나는 못가 본 우리나라 산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실은 국내 산을 오른 데가 많지 않다.
산이 많은 데 비하면 거의 오르지 않은 거나 다름없다는 이야기다.
오랜 세월 등산하며 내가 주로 간 데는 설악산과 지리산과 한라산 정도고, 여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덕유산이다.
결국 나는 우리나라 3대봉과 다음으로 높은 산을 주로 올랐으니 표고 1600m 이상인 4대봉을 나의 등산 무대로 삼아온 셈이다.
내가 이 산들을 주로 가는 것은 그러나 그 높이 때문만이 아니다.
서구에서는 등산가가 마터호른에 오르지 않았다면 등산가로서 불완전하게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마터호른의 높이를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거기에는 산으로서의 성격과 조건이 있으며 우리나라 4대봉도 그런 관점에서 보고 싶다.
한라산을 비롯한 이들 4대봉은 우리나라 산악인으로 오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감회로 그 산들을 오르내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4대봉은 보통 생활환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런 점에서도 산에 가는 느낌이 특별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이 구체적으로 자기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산에 갔던 의미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나는 오랜 세월 북한산과 도봉산에 갔다.
서울 주변에는 이밖에 수락산, 불암산 그리고 관악산 등이 있는데 역시 주말마다 주로 찾는 곳은 북한산과 도봉산이다.
이 두 산이 다른 산들과 어떻게 다른지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즐겨 가는 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다.
나는 산에 갈 때 언제나 처음 가는 기분으로 간다.
기도 레이가 “등산은 언제나 초등”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렇다고 본다.
이러한 초등의 기분이야말로 가까운 주말 등산의 무대에서보다는 적어도 2박 3일 정도의 여정으로 가는 원거리 산행에서 더욱 강하다.
프레쉬 휠드가 고산의 정신적 매력은 멀고 접근하기 어려운 점에 있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고산은 멀리 허공에 뜬 듯한 만년설에 덮인 히말라야 오지의 산을 두고 하는 말인데, 우리에게 설악산이나 지리산이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가까운 산들보다 1000여m가 넘기 때문에 역시 고산으로서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등산에는 고도 지향성과 등정이라는 성취감이 있다.
그래서 산악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정상을 향하고 드디어 야호를 외친다.
그런데 나는 산을 오를 때 감동이나 감회를 다른 데서 찾는다.
산을 오르면서 처음에 힘차게 흐르던 골짜기 물줄기가 차차 줄어들며 물소리가 멀어질 때, 옆의 능선이 어느새 낮아졌을 때, 오랜 세월 풍설과 싸우다 쓰러진 고사목이 길을 가로막을 때, 그러자 주위가 밝아지면서 곧 수림지대를 벗어나게 되는 것을 안다.
이제 정상은 멀지 않다.
그런데 나는 산에 갈 때 반드시 정상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등정을 성취로 여기지 않는다.
등산에서 등정이 목적이고 성취로 여기는 것은 미답봉을 대할 때 이야기며, 지구상에 그러한 미답봉이 이미 사라진 지 오랜 오늘날에 여전히 등정을 목표로 하고 성취로 삼는다면 차원이 낮은 이야기며 일종의 아나크로니즘이나 다름없다.
등산의 세계는 그러한 단순 논리로 이해할 수 없으며, 여기 대자연이 품고 있는 또 다른 의미를 찾을 때가 왔다.
나는 산을 오를 때 등정 못지않게 그 과정을 중요시한다.
정상에 올라서면 넓은 지평선이 눈앞에 벌어지는데 그 순간 허탈감이 따른다.
이 허탈감은 그토록 어렵게 오른 데 비해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상을 향해 오르는 동안에는 우선 목표를 향한 강한 의지와 줄기찬 노력이 온갖 위험과 고난을 이기게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발견이 이어진다.
목이 타오를 때 때맞춰 나타나는 석간수, 길을 찾아 허덕일 때 수줍은 듯이 피어있는 소박한 금강초롱…. 높이 1000m 지대를 넘어선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나라는 고산지대라 할 수 없으며 낮은 산들이 첩첩 이어지고 있을 뿐 그밖에 이렇다 할 특색이 없다.
울창하고 깊은 숲이나 고요를 간직한 산간 호수가 없다.
산속 은밀한 곳에 온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채로운 야생화가 피어나는 넓은 고원도 없다.
봄철 한때 비교적 높은 지대에 철쭉이 주위를 벌겋게 수놓는 것이 고작이다.
이토록 무미건조한 우리나라 산에 그나마 내가 거는 기대는 오직 원추리 꽃밭이다.
표고 1000m 지대를 넘어서면서 여기 저기 눈에 띄기 시작하는 원추리 꽃은 우리나라 어느 산에도 있으나 그 군락은 오직 지리산의 노고단과 덕유산의 향적봉에서 볼 수 있으며, 이곳이 표고 1500m를 넘어선 데라는 것을 생각할 때 지리와 덕유에 오르는 정취가 물씬하다.
지난 1977년 에베레스트에 그리고 그 이듬해 북국 그린란드에 갔을 때 다시없는 만고의 고요와 무한성을 느꼈지만 이에 못지않게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찬바람에 떨고 있는 에델바이스와 커튼그라스의 군락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대 가까이 된 오늘날 히말라야 오지 중의 오지 에베레스트에는 계절 없이 등반대와 트레커가 모여들어 태곳적 적막이 사라졌지만, 지구의 꼭대기 그린란드의 망망대해 같은 설빙원의 무한성의 세계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등행은 경기가 아니며 등행 뒤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고 뽈 베시에르가 말했다.
그뿐이랴. 등산에는 다른 스포츠에 없는 과정이 있으며, 이러한 과정은 등산 무대인 대자연 속이 아니라면 결코 얻을 수 없는 체험이며, 우리 생의 도약을 부추기는 소중한 모티브인 셈이다.
특히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길은 그러한 과정의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경우다.
우선 에베레스트의 고전적 어프로치는 380㎞ 구간을 20여 일 걸어가는데, 아열대에서 한대까지 이르는 그 수직이동 과정은 그야말로 다양하고 다채로운 변화와 발견으로 이어진다.
즉 용설란과 부겐비리아 등 아열대 식물이 무성한 야산지대를 지나 야생 화초가 군생하는 고원에 올라섰다가 다시 격류가 미친 듯이 날뛰는 심산유곡으로 내려가며 점차 고도를 높인다.
그러자 기괴한 모습의 설산이 나타나고 비로소 멀리 히말라야 오지 품에 안긴 것을 안다.
목에 건 고도계를 들여다본다.
심산유곡이 어느새 사라지고 앙상하고 거친 외딴 세계가 나타난다.
빙하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지대에 오가는 사람이 있을 리 없고 생물체란 눈에 띄지 않는다.
완전히 버려진 땅이다.
그러자 죽은 듯한 고요함에 잠긴 거무스름한 호수가 나타난다.
이른바 빙하호인 셈이다.
‘serenity’가 지배하는 세계. 이것은 ‘stillness’나 ‘tranquillity’와도 다르다.
빙하에서 얼음 꺼지는 소리가 들린다.
태곳적 소리다.
에베레스트의 관문인 아이스폴을 넘어서며 시작하는 웨스턴 쿰 지대를 1952년 처음으로 지나간 스위스 등반대가 여기를 ‘침묵의 계곡’이라고 불러 오늘에 이른다.
그들은 끝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지 못했지만 그 과정은 이렇게 영원히 역사에 남았다.
오늘날 등산이 생활화하다시피 되며 주위에는 건강이나 여가 선용을 일삼아 산에 간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러나 건강은 등산의 부산물이 될지언정 목적은 아니며 여가 선용의 대상이 등산도 아니다.
나는 산에 오를 때 정복이나 성취보다는 일상성의 탈출과 인간 존재를 구속하는 데서 자유로운 몸이 되는 데 그 의의와 가치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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