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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즐겨 가는 데는 사투리가 살아있는 곳이다. 사투리가 살아있는 곳엔 때묻지 않은 풍경이 있다. 그런 곳에 가면 처음 본 얼굴이라도 끼니때면 밥 챙겨주는 인심이 살아있고, 개발과 근대화의 물결에 덜 휩쓸려 풋풋한 자연이 살아있다. 그런 곳은 꼭 도시에서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 인근에도 숨겨진 오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광주와 무등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있는 화순 수만리 일대는 도시가 지척이지만, 인심과 말씨와 풍경이 때묻지 않은 곳 중 하나이다.
바람은 차고, 산등성이 억새는 금빛으로 출렁거렸다. 고개를 넘어 수만리로 들어서자, 다랑치(작은 논)들이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고기처럼 떼로 몰려다녔다. 계곡의 잔돌을 감고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수만리(水滿里). 물소리가 차가웠다. 감나무 밭에 몇 사람이 모여 감을 따고 있었다. 남자 하나에 여자가 셋이었다. 나무에 오른 이는 수만리 2구 이장인 박병문(63세) 씨였고, 나무 아래에서 감을 받고 있는 이는 한희용(55세) 씨였다. 박씨가 감을 따서 던지면, 아래에 서 있는 한씨가 받았다. 수만리가 원래는 4구였는데, 최근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이전의 1, 2구를 합해 1구로 하였고, 3, 4구를 모아 2구로 하였다는 설명도 있었다. 박씨의 부인인 이영자(55세) 씨는 흙바닥에 앉아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꽃 속에서 논께 행복해분당께." 익살이 좋은 박씨는 시종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 감 하나를 따서 한씨에게 던진 박씨가, "잘 받네." 하고 말하자, 한씨가 지지 않고, "내가 원래 야구 선수잖아요." 라며 말을 이었다. 이내 박씨는 동네 자랑을 하였다. "여기가 대한민국 알프스여." 말을 하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그런데 끝이 헐거운 간짓대(긴 대로 만든 장대)는 여러 번 감을 떨어뜨렸다. "간짓대가 못 쓰겠네요." 하였더니, "짜개져 갖꼬. 요것도 늙은 게 헌 것 되부요, 나 마이로(같이)." 하였다.
감은 그다지 굵지 않았는데, 감이 잔 이유를 박씨는 알고 있었다. "감나무가 오래된 게 맛있당께, 그랴. 고목감이 맛있어. 감나무가 늙을수록 굵어져요. 닭 알 낳는 식으로." 비유가 재미있었다. 박씨의 부인 이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아주머니는 도시에서 왔다는데, 이름도 나이도 밝히지 않았다. "아가씨여. 완전 백수여 갖꼬. 우리는 농사꾼이라 주름이 짜글짜글하고." 박씨의 말이었다. "홍시는 없네요." 하였더니, "홍시가 되먼 참새들이 다 파묵어 부러." 하였다. 부인의 이름을 알려 주면서 "우리 영자씨를 내가 데꼬 사요. 흔해 빠진 여자 이름." 이라는 설명을 붙였다. "말씀하시는 표현들이 참 재밌네요." 하였더니, "옴마. 그랴? 직업 선택을 잘못 해부렀구마. 작가가 되야 쓰껏인디." 하였다. "멋없이 나이를 묵어 부렀다" 는 박씨는 헤어질 때 기어이 감 몇 개를 선물로 주었다.
박씨 일행과 헤어진 뒤 수만리 1구를 찾아가는데, 그만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밭에서 일하고 계신 할머니께 길을 물었더니, "물촌서 서성리로 내려와야 되요." 라고 설명해 주었다. 할머니의 말씀대로 차를 돌려 겨우 찾아간 수만리 1구. 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마을은 조용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골목 끝 집 마당에 한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물팍이 아퍼." 잘 걷지도 못한다는 최정렬 할아버지는 나이를 묻자, "야든둘(82세)이라우." 라고 대답을 하셨는데, 잠시 후에 나타난 이앵례(82세) 할머니에 의해 나이가 정정되었다. 기력이 쇠한 탓에 나이마저도 가물거린 듯하였다. "시아제한테 놀러 오는 길." 이라는 이앵례 할머니에게 나이를 물었더니, 똑같이 "야든둘." 이라는 대답이 나왔던 것이다. "두 분이 동갑이시네?" 하였더니, 이앵례 할머니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아제가 일흔야답인가?" 결국 두 분의 띠를 묻고서야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있었다.
"시아제는 비암(뱀) 띠. 나는 디아지(돼지) 띠."
그제서야 최정렬(76세) 할아버지의 정확한 나이가 밝혀졌다. 집 둘레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밑동이 굵은 감나무 높은 가지 끝에는 두 주먹을 합한 것 만한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개중에 몇 개는 잘 익은 홍시였다. "우와 홍시도 있네요." 하였더니, 이앵례 할머니가 "따묵을 사람이 없어서 따묵도 못 해." 하였다. 간짓대를 찾아보았더니, 마당가에 세워져 있었다. 홍시 하나를 따서 내려놓고 감나무를 살폈더니, 할머니가 "요것도 익었어." 하고 감 하나를 가리켰다. "안 익은 거 같은데요?" 하면서 따보았더니, 할머니의 말대로 잘 익은 감이었다. "보기만 하먼 알어." 할머니는 미소를 가득 띄운 얼굴로 말하였다.
"시(세) 개는 따사 한나썩 묵겄다." 할머니는 우리 일행의 숫자를 헤아리며, 감을 더 따라고 하였다. 감은 모두 다섯 개를 땄다. 그만 따려고 간짓대를 있었던 자리에 놓아두려 움직이는데, 할머니가 "한나 더 따." 그랬다. 할머니 말대로 감 하나를 더 땄더니,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면서 "개비에 여(넣어)." 그랬다. 최정렬 할아버지는 시종일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많이 아프신가 봐요?" 하면서 손을 주물러 드렸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아퍼." "아퍼." 소리를 연발했다. "농사 짓기도 힘드시겠네요?" 하였더니, "나랏돈 묵고 살어." 하였다.
마을 앞 계곡 너머에서 부부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소로 쟁기질을 하고 있었고, 여자는 그 뒤를 따르며 무엇인가를 허치고(뿌리고) 있었다. 일하는 모습을 가까운 데서 보고 싶어 가는데, 한 중년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이름을 물었더니, "이름은 묻지 말고, 그냥 우당(雨堂)이라고만 하면 된다."면서, "임곡양반 쟁기질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그림이제." 하였다. 몇 마디 나누고 나서 금방 친해져서, 일을 마치고 꼭 들르라고 하였다. 뜻밖의 초대였던 셈이다. 임곡양반이라는 택호를 가진 이현식(76세) 할아버지는 힘이 장사라고 하였다. 계곡 옆에 위치한 꽤 너른 밭을 항상 소로 쟁기질하는데, 그 밭도 젊은 시절 직접 개간한 것이라 하였다. 할아버지는 쟁기질을 하고, 할머니(서정림·70세)는 비료를 뿌리고 있었다. "이러.", "저러." 하는 쟁기질 소리에 계곡이 쩌렁쩌렁 울렸다. 한참이나 그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의 옷차림이 이상하였다. 자세히 보니 웃옷의 앞뒤가 바뀌어 있었다. "할아버지 옷을 거꾸로 입으셨네요." 하였더니, "꺼꾸로든 올케든 암케나(아무렇게나) 입어."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물어 가는 초겨울 오후 소가 끄는 쟁기 너머로 무등산은 한 뼘 더 높아지고 있었다.

산 깊은 곳이라 어둠이 순식간에 내려올 것이란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기까지 갔는데, 서성리에 있는 환산정(環山亭)을 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환산정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정자인데,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백천 류함(百泉 柳涵)이 청주까지 진격했으나,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은거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그 당시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그의 시 '환산정을 짓고서(環山亭原韻)' 를 읽어보면 잘 알 수 있다. '뜰에는 외로운 소나무요 섬돌에는 국화인데 / 도연명에게 진나라를 배웠도다 / 세상이 어지러워 처음 세웠던 꿈 다 그르쳤고 / 깊숙이 산수 좋은 곳에 만년을 의지하리 / 피고 지는 봄가을 모두 잊고 싶지만 / 마음에는 일월처럼 명나라가 떠오르네 / 군자가 지켜야 할 절의 그 누가 알아주리 / 답답한 내 심정을 구봉(九峯)에나 말하리라' 여기에서의 '구봉(九峯)' 은 산봉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친교가 깊었던 구봉(九峯) 조엽을 뜻한다. 그 후 정자는 몇 번의 중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문화류씨(文化柳氏)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들어갈 수 없게 철망으로 막아 놓았다.
어지간한 댐 규모의 저수지인 서성제의 물은 살 벨 듯 푸르고, 정자 너머로 보이는 서암 절벽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누구의 마음일까? 아픈 듯 새겨진 무늬들은 오래되어 음각된 그리움 같고, 사랑이라면 눈물 많은 사연이 담긴 사랑 같다. 그래도 절실하여 오직 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이 적힌 편지 같기도 하고, 빛이 바래어 가는 나뭇잎에 적은 절절한 사연 같다. 힘들게 들어간 정자는 밖에서 볼 때보다 운치가 더 있었다. 잔물결들이 속삭임처럼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랜 그리움을 향해 한 통의 편지를 썼다.

밤 깊어 우당(雨堂 강성수·54세)선생의 집으로 가서 예정에도 없었던 환대를 받았다. 계곡 가까운 곳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그가 직접 담았다는 복분자주를 취하도록 마셨던 것이다. 계곡 물 소리가 귀로 흘러들었다. 그가 직접 담았다는 복분자주를 취하도록 마시면서 들었던 수만리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는 몇 권의 책으로도 정리하기 힘들 것 같았다. 숯을 많이 이고 다녀서 머리가 납작해졌다는 수만리 사람들. 이름만으로도 이야기가 될 것 같은 지렁이댁, 한동댁, 서암댁. 요로법(자신의 오줌을 받아서 먹는 건강요법)으로 92세의 나이에도 건강하다는 우매기 양반 등. 수만리 사람들은 풀처럼 나무처럼 그렇게 산이 되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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