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들 장마
박용래
건들 장마 해거름 갈잎 버들붕어 꾸러미 들고 원두막
처마밑 잠시 섰는 아이 함초롬 젖어 말아올린 베잠방이
알종아리 총총 걸음 건들 장마 상치 상치 꽃대궁 백발의
꽃대궁 아욱 아욱 꽃대궁 백발의 꽃대궁 고향 사람들 바자울 세우고 외넝쿨 거두고.
장마 끝나고
김용화
장마 끝나고
징검다리 하나 둘 모습 드러내면
시냇물 맑아져 송사리 피라미떼 줄을 짖는다
아랫내 물턱
큰물에 휩쓸려온 방개고무신 한 짝 걸려 있다
하늘이 푸르고 구름이 빠르게 움직인다
버들붕어 한 꿰미씩 들고 곱돌모랭이 돌아오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장마
홍윤숙
보리 이삭 누렇게 탄 밭둑을
콩밭에 김매고 돌아오는 저녁
청포묵 쑤는 함실 아궁이에선
청솔가지 튀는 소리 청청했다
후득후득 수수알 흩뿌리듯
지나가는 저녁비, 서둘러
호박잎 따서 머리에 쓰고
뜀박질로 달려가던 텃밭의 빗방울은
베적삼 등골까지 서늘했다
뒷산 마가목나무숲은 제철 만나
푸르게 무성한데
울타리 상사초 지친 잎들은
누렇게 병들어 시들었고
상추밭은 하마 쇠어서 장다리가 섰다
아래 윗방 낮은 보꾹에
파아란 모기장이
고깃배 그물처럼 내걸릴 무렵
여름은 성큼 등성을 넘었다
가랑비·이슬비
김삼주
가랑비는 소리 없이 밤새 내리고
떠나는 누이 옷섶 밤새 적시고
개울물 남실대는 징검다리에
흔들리는 치맛자락으로 고누는 이별
청실홍실 꿰어서 가는 누이와
별사는 짧고도 한없이 길어
이슬비는 소리 없이 종일 내리고
우리들 눈썹 위에 종일 맺히고
그리운 폭우
곽재구
어젠 참 많은 비가 왔습니다
강물이 불어 강폭이 두 배로 더 넓어졌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금세라도 줄이 끊길 듯 흔들렸지요
그런데도 난 나룻배에 올라탔답니다
내 낡은 나룻배는 흙탕물 속으로 달렸습니다
아, 참 한 가지 빠트린 게 있습니다
내 나룻배의 뱃머리는 지금 온통 칡꽃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폭우 속에서 나는 종일 꽃장식을 했답니다
날이 새면 내 낡은 나룻배는 어딘가에 닿아 있겠지요
당신을 향한 내 그리움의 지름길은 얼마나 멀고 또
험한지........
사랑하는 이여.
어느 河上엔가 칡꽃으로 뒤덮인 한 나룻배가 얹혀 있거든
한 그리움의 폭우가 이 지상 어딘가에 있었노라
가만히 눈감아줘요
가
류시화
1.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렸구나
밤 사이 강물은 내 키만큼이나 불어나고
전에 없던 진흙무덤들이 산 아래 생겨났구나
풀과 나무들은 더 푸르러졌구나
집잃은 자는
새 집을 지어야 하리라
그토록 많은 비가 내려
푸르른 힘을 몰고 어디론가 흘러갔구나
몸이 아파 누워 있는 내 머리맡에선
어느새 이 꽃이 지고 저 꽃이
피어났구나
2.
그토록 많은 비가 내리는 동안
나는 떡갈나무 아래 선 채로 몸이 뜨거웠었다
무엇이 이곳을 지나 더 멀리 흘러갔는가
한번은 내 삶의 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모든 것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한번은 이보다 더 큰 떡갈나무가
밤에 비를 맞으며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내 생각은 얼마나 더 깊어지고
떡갈나무는 얼마나 더 풍성해졌는가
3.
길을 잃을 때면
달팽이의 뿔이 길을 가르쳐주었다
때로는 빗방울이
때로는 나무위의 낮선 새가
모두가 스승이었다
달팽이의 뿔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나는 먼 나라 인도에도 다녀오고
그곳에선 거지와 도둑과 수도승들이
또 내게 길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병들어 갠지스 강가에 쓰러졌을 때
뱀부리는 마술사가 내게 독을 먹여
삶이 한 폭의 환상임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 영원히 나는 입맛을 잃었다
4.
그때 어떤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펼치고
빗속을 날아갔었다
밤이었다
내가 불을 끄고 눕자
새의 날개가 내 집 지붕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나서도 오랫동안
비가 내렸다
나는 병이 더 깊어졌다
그래, 옹이진
가슴까지 비틀어
짜거라. 힘 다하여
소리도 내지르고
그 속에서 성냥불을
확 그어댈 수 있는 것은
너만이 할 수 있는 몸짓이다
쏟아 붓는 회색 하늘의 몽정
시원한 배설
번갯불에 일 저질르고 갔구나
젖은 여인의 대지(大地)는
타오른 활기로 안개늪에 눕다
앙앙대는 소리도
뚝 그쳤다.
(이승복, <장맛비 오는 날> 전문)
장마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 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 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다오.
천상병作
빗속에
그리운 만큼의 거리로..
그림/박혜라(이하 동일)
비(雨) / 이형기
적막강산에 비 내린다.
늙은 바람기
먼 산 변두리를 슬며시 돌아서
저문 창가에 머물 때
저버린 일상
으슥한 평면에
가늘고 차운 것이 비처럼 내린다.
나직한 구름자리
타지 않는 일상..
텅 빈 내 꿈의 뒤란에
시든 잡초 적시며 비는 내린다.
지금은 누구나
가진 것 하나하나 내놓아야 할 때
풍경은 정좌하고
산은 멀리 물러앉아 우는데
나를 에워싼 적막강산
그저 이렇게 저문다.
살고 싶어라
사람 그리운 정에 못 이겨
차라리 사람 없는 곳에 살아서
청명과 불안
기대와 허무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린다.
아 이 적막강산에 살고 싶어라.
빗속에는 얼굴이 있다..
아련한 만큼의 깊이로...
빗물같은 정을 주리라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 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無償)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김남조 作
빗속에는 그대가 있다..
평생을 가는 그리움으로..
"비 그치고"
비 그치고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 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푸르름이 아주 깊어졌을 때쯤이면
이 세상 모든 새들을 불러 함께
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류시화 作
두고온 얼굴이 있다..
잊지못한 사랑을 안고 사는..
새벽비 / 김두수
이른 아침 새벽 비는 내리고
벌거벗은 내 마음 갈 길을 잃었나
네 줄기 갈래길과 아홉의 환상
흙 묻은 구두 한 짝이 들판에 버려져 있네
말씀의 이 세계 날 구할 수 없네
무언의 대지 위엔 나를 깨우는 꿈
저 바람 속에 검은 새 날을 때
침묵을 기르는 비가 내린다
경계의 저편, 아득히 함성이 울려도
나는 들을 수 없네 순례자의 북소리
잠든 나를 깨우나 저 억만 개의 빗줄기
그 누구의 꿈인가, 비가 내린다
이른 아침 새벽 비는 내리고
벌거벗은 내 마음 갈 길을 잃었나
미명의 저 언덕 위에 지명없는 이정표
슬픈 이방인이 나는 되었네
나는 오늘 떠나리 새벽비 맞으며
나는 오늘 떠나네 새벽비 맞으며
차라리 내가 비라면..
스며들텐데...
비/이정하
비가 내린다.
인정이 메마른 거리
목마른 가슴들을 적시며
우리들 어깨위로 비가 내린다.
생각하면
아쉬울 것도 없는 삶의 둘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며
날마다 간절히 기도하는 것일까
사람마다
무거운 삶의 일상을 짊어지고
어깨 맞대고 출근하는 아침 길.
우리들
상처난 마음의 계단을 밟으며
가슴마다 우울한 비가 내린다.
하늘아래
바람은 쉼 없이 불고
끝까지 쓰러지지 않는 나무들.
한방울 물이라면.... 젖어들텐데....
비오는 날의 소묘 - 이선화
누런 양동이, 처마 밑에서
납작한 가슴이 제법 부풀어 오른다
지난날 맥없이 잘려나간 꿈들이
울울창창 되살아나고
허공에 그어대는 사선의 자유를 따라
때 절은 기억들이
창창한 오기를 키우고 있다
일상의 궁금증을 잠시 가두고
이대로 며칠 비에 젖어
비스듬한 중심을 깜박이노라면
젖은 그리움들
투명하게 부화할 수 있을까
아, 보면 볼수록
직선으로 낙하하는 물의 둥근 일생 아름다워
나도 비처럼 네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그러면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될 수 있을까
점점 익은 소리를 내며 내리꽂힌
저것들이 또다시 비상(飛上)할 무렵
나는 그 아래 엎드린 사막이 되어도 좋겠다
죽음조차 황홀해지는 오늘 같은 날에는..
장마
신경림
온 집안에 퀴퀴한 돼지 비린내
사무실패들이 이장집 사랑방에서
종돈을 잡아 날궂이를 벌인 덕에
우리들 한산 인부는 헛간에 죽치고
개평 돼지비계를 새우젓에 찍는다
끗발나던 금광시절 요릿집 애기 끝에
음담패설로 신바람이 나다가도
벌써 예니레째 비가 쏟아져
담배도 전표도 바닥난 주머니
작업복과 뼛속까지 스미는 곰팡내
술이 얼근히 오르면 가마니짝 위에서
국수내기 나이롱뺑을 치고는
비닐우산으로 머리를 가리고
텅 빈 공사장엘 올라가본다
물 구경 나온 아낙네들은 우리 피해
녹슨 트랙터 뒤에 가 숨고
그 유월에 아들을 잃은 밥 집 할머니가
넋을 잃고 앉아 비를 맞는 장마철
서형은 바람기 있는 여편네 걱정을 하고
박서방은 끝내 못 사준 딸년의
살이 비치는 그 양말 타령을 늘어놓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