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별과 詩가 있는 마을

[스크랩] 추석 시 모음

산술 2013. 1. 9. 12:39
* 추석 무렵 - 김남주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뎅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 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

 

*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 - 서정주

추석 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

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

그 속 푸른 풋콩 말아넣으면

휘영청 달빛은 더 밝어 오고

뒷산에서 노루들이 좋아 울었네

 

"저 달빛에 꽃가지도 휘이겠구나!"

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어 웃고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

 

* 추석 - 이병초

굵은 철사로 테를 동여맨 떡시루
어매는 무를 둥글납작하게 썰어 시루구멍을 막는다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호박고지를 깔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통팥 뿌리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낸내 묻은 감 껍질 구겨넣고
쌀가루 한 둘금 그 위에
자식들 추석옷도 못 사준 속 썩는 쑥 냄새 고르고
추석 장만한다고 며칠째 진이 빠진 어매
큰집 정짓문께 얼쩡거린다고 부지깽이  내두르던 어매
목 당그래질 해대는 것이 무지개떡 쇠머리찰떡만은 아닌지
쌀가루 이겨 붙인 시루뽄이 자꾸 떨어지는지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앞에서 어매는
부지깽이 만지작거리며 꾸벅꾸벅 존다 *

 

* 추석무렵 - 맹문재
흙냄새 나는 나의 사투리가 열무맛처럼 담백했다
잘 익은 호박같은 빛깔을 내었고
벼 냄새처럼 새뜻했다
우시장에 모인 아버지들의 텁텁한 안부인사 같았고
돈이 든 지갑처럼 든든했다

빨래줄에 널린 빨래처럼 평안한 나의 사투리에는
혁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호치키스로 철하지 않아도 되었고
인터넷 검색이 필요 없었다
월말이자에 쫓기지 않아도 되었고
일기예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

 
나의 사투리에서 흙냄새가 나던 날들의 추석 무렵
시내버스 운전사의 어깨가 넉넉했다
구멍가게의 할머니 얼굴이 사과처럼 밝았다
이발사의 가위질소리가 숭늉처럼 구수했다
신문대금 수금원의 눈빛이 착했다

 

* 秋夕 - 장철문
저 둥글고 빛나는 것이 떨어지지 않고
하늘에 떠 있다
그날 저녁 내가
할머니의 수제비 반죽을 집어던진 것이 그만
저 먼 곳에 가서 빛을 얻은 것이다
저 크고 희게 빛나는 것이
딸아이를 향해 자꾸 수제비를 빚어 던진다 *

 

* 가배절(嘉俳節) - 심훈
팔이 굽지 않았으니 더덩실 춤도 못추며
다리 못펴 병신(病身) 아니니 가로 세로 뛰진들 못하랴
벼 이삭은 고개 숙여 벌판에 금(金)물결이 일고
달빛은 초가(草家)집 용마루를 어루만지는 이 밤에 ㅡ

뒷동산에 솔잎 따서 송편을 찌고
아랫목에 신청주(新淸酒) 익어선 밥풀이 동동
내 고향(故鄕)의 추석(秋夕)도 그 옛날엔 풍성(豊盛)했다네 

기쁨에 넘쳐 동네방네 모여드는 그날이 오면

기저귀로 고깔 쓰고 무등서지 않으리
쓰레받기로 꽹가리치며 미쳐나지 않으리
오오 명절(名節)이 그립구나! 단 하루의 경절(慶節)이 가지고 싶구나! *

 

* 嘉俳節 -유치환 
하늘은 높으고 기운(氣運)은 맑고
산과 들에는 풍요한 오곡의 모개
신농(神農)의 예지와 근로의 축복이
땅에 팽배한 이 호시절 ㅡ
오늘 하로를 즐겁게 서로 인사하고
다 같이 모혀서 거륵한 축제를 드려라
올벼는 베여다 술을 담어 비지고
해콩 해수수론 찧어서 떡을 짓고
장정들은 한 해 들에서 다듬은 무쇠다리를
자랑하야 씨름판으로 거지고 나오게
장기를 끄른 황소는 몰아다 뿔싸홈을 붙혀라
새옷자락을 부시시거리며 선산(先山)에 절하는
삼간 마음성들 솔밭새에 흩어젔도다 *

 

* 밤 - 오탁번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음앉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 팔월 한가위 - 반기룡
길가에 풀어놓은
코스모스 반가이 영접하고
황금물결 일렁이는
가을의 들녘을 바라보며
그리움과 설레임이
밀물처럼 달려오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한동안 뜸했던
친구와 친지, 친척 만나보고
모두가 어우러져
까르르 웃음 짓는 희망과 기쁨이
깃발처럼 펄럭이는
그런 날이었으면 합니다

꽉 찬 보름달처럼 풍성하고
넉넉한 인심과 인정이 샘솟아
고향길이 아무리 멀고 힘들지라도
슬며시 옛 추억과 동심을 불러내어
아름다운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 수 있는 의미있고 소중한
팔월 한가위이었으면 합니다 *


* 한가위엔 연어가 된다 - 이승복

백여폭 병풍으로 산들이
둘러리서고 꽹과리 장구의
신명난 굿패 장단에 웃음꽃
피우며 손들을 잡았다
한가위 만월을 감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일상 등짐을 벗고서
놀았던 춤사위, 신명난 어깨춤으로
더덩실 춤을 춘다

 

고향이 타향이 된 이들이
고향이 객지가 된 이들이
한가위엔 연어가 되어서
한 옛날 맴돌던 언저리서
술잔에 푸념을 타 마시며
거푸 잔을 돌린다
어색한 서울 말투가 낯설게 
톡톡 튄다 '치워라귀간지럽다'

잊을 만 하면 불나비 되어
고향지기를 찾아와 몸을 태운다
재가 되는 몸들이 벌겋게 변하다가
달빛 흠뻑 먹어 하얗게 익어간다

고향을 떠난 이는
외톨로 떠돌아 외롭고
남은 이는 다 떠나서 서럽단다
정들면 어디든 고향이라지만
미물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데
못내 가슴에 고향을 키우는 은빛 연어도
선영하(先瑩下) 어버이 발끝에 앉아
고향을 가슴에 심는다
눈에다 고향을 담는다 *

 

* 섬진강 17 - 동구 김용택  

추석에 내려왔다

추수 끝내고 서울 가는 아우야

동구 단풍 물든 정자나무 아래

ㅡ 차비나 혀라

ㅡ 있어요 어머니

철 지난 옷 속에서

꼬깃꼬깃 몇푼 쥐여주는

소나무 껍질 같은 어머니 손길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고개 숙여 텅 빈 들길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우야

서울길 삼등열차

동구 정자나무 잎 바람에 날리는

쓸쓸한 고향 마을

어머니 모습 스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어머니 어머니 부를 아우야

찬서리 내린 겨울 아침

손에 쩍쩍 달라붙는 철근을 일으키며

공사판 모닥불 가에 몸 돌리며 앉아 불을 쬐니

팔리지 않고 서 있던 앞산 붉은 감들이

눈에 선하다고

불길 속에 선하다고

고향 마을 떠나올 때

어여 가 어여 가 어머니 손길이랑

눈에 선하다고

강 건너 콩동이랑

들판 나락가마니랑

누가 다 져날랐는지요 아버님

불효자식 올림이라고

불효자식 올림이라고

너는 편지를 쓸 것이다 *

 

* 八月十五夜 - 추석날 밤 - 李荇

平生交舊盡凋零 - 평생교구진조령 - 평생 사귄 벗들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白髮相看影與形백발상간영여형 - 흰머리의 몸과 그림자만 서로 바라보네

正是高樓明月夜정시고루명월야 - 높은 누대에 달 밝은 이런 밤이면

笛聲凄斷不堪聽 적성처단불감청 - 피리 소리 처량하여 차마 듣기 어렵네*

* 김용택의 한시산책

출처 : 숲속의 작은 옹달샘
글쓴이 : 효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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