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1
<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 >
*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은 추사의 삶 *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 금석학자 · 고증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이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그는 1786년(정조10년) 오늘날 추사고택이라고 부르는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향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판서를 지낸 김유경이다.
추사의 일생은 보통 다섯단계로 나뉘어진다.
- 태어나서부터 연경에 다녀오는 24세까지의 수업기
- 연경을 다녀온 25세부터 과거에 합격하는 35세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 관직에 나아가는 35세부터 제주도로 귀양가는 55세까지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 55세부터 63세까지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는 9년간의 유배기
-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나서부터 세상을 떠나는 71세까지 8년간의 만년기.
"추사체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추사체가 뭐냐 하면 대답을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추사체는 우리들이 쓰고 있는 글씨들이라고 해도 될지 모른다. 그의 대표적인 글씨 '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를 보자. '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제주도 유배 후 강상(한강 용산변의 강마을)시절의 대표작이다. 글자의 윗선을 맞추고 내리긋는 획은 마치 치맛자락이 휘날리는 듯 변화를 주었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글씨는 추사 김정희밖에 없었다. 빨래줄에 빨래 걸린 듯하지만 필획이 맞으니 자유분방하다고 표현한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유최진의 '초산잡서'에서) '잔서완석루'와 함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선게비불(禪偈非佛)'과 '판전(板殿)' 같은 작품을 보면 추사체의 '괴이함'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선게비불'은 획의 굵기에 다양한 변화가 있어 울림이 강하고 추사체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판전'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대자 현판으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보여주는 명작. 파격이라 하기보다는 어린애 글씨같은 천연덕스러움이 있다. 추사체는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에 그치지 않고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의 경지에까지 나아갔다.
추사 글씨체 변화에 대하여
추사체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과 그 선조들, 그리고 청나라 고증학이 합해져서 가능해진 것이다. 추사와 동시대에 활동한 박규수는 추사체의 형성과 변천과정에 대해 "...완옹(阮翁)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무렵 추사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박규수의 증언에서도 드러나듯이 추사체의 골격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 시기는 제주도 유배생활. 완당은 55세때인 1840년 10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속에서만 생활하도록 하는 형벌)되는 유배의 형을 받게 된다. 유배가던 길에 있었던 일로 두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하나는 전주를 지날 때 그곳의 이름난 서가 창암 이삼만을 만난 얘기다. 창암은 전형적인 시골 서생으로 요즘으로 치면 지방작가였다. 원교의 글씨를 본뜬 창암의 글씨는 속칭 유수체라 하여 그 유연성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이 도도하지 못하여 영락없이 시골 개울물 같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꾸밈없고, 스스럼없는 천진스러움의 진국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런 창암이 완당에게 글씨를 보여주며 평을 부탁한 것이다. 완당은 이때까지만 해도 배 갑판 밑에 모여사는 쥐의 수염만으로 만든 붓 등 최고의 붓과 종이로 글씨를 쓴 '스타일리스트'였기 때문에 창암의 개꼬리를 훑어내어 만든 붓으로 쓴 글씨를 보고 일순 당황했을 성 싶다.
그때 창암은 완당보다 열여섯이 더 많은 71세의 노인이었다. 현장엔 그의 제자들이 쭉 배석해 있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완당이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창암은 완당이 삽짝을 닫고 나가는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저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맛은 잘 모르는 것 같더라."
전주를 떠난 완당은 해남 대둔사로 향했다. 절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대웅보전(大雄寶殿)' 네글자가 원교의 글씨였다.
완당은 초의선사를 만난 자리에서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게!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 하고 지필묵을 가져오게 해 힘지고 윤기나며 멋스러운 글씨로 대웅보전 네글자를 써주며 나무에 새겨 걸라고 했다.
완당은 붓을 잡은 참에 '무량수각'이라는 현판 횡액을 하나 더 써주었다.
= 中 略 =
말년인 과천시절 완당이 남긴 '대팽두부(大烹豆腐)'는 결국 완당이 살아온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최고 가는 좋은 반찬이란 두부나 오이와 생강과 나물 大烹豆腐瓜董菜
최고 가는 훌륭한 모임이란 부부와 아들딸과 손자 高會夫妻兒女孫
글 내용과 글씨 모두가 완당의 예술이 평범성에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잘 쓰겠다는 의지를 갖지도 않은 상태에서 절로 드러난 불계공졸의 경지이다.
아만(我慢)의 반성
[조선일보 / 정민의 세설신어 - 35]
추사는 좀체 남을 인정하는 법이 없었다. 남이 한 것은 헐고, 제 것만 최고로 쳤다. 아집과 독선에 찬 언행으로 남에게 많은 상처를 입혔다. 그가 단골로 꺼내든 카드는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실물을 봤는데'였다.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한마디에 그만 꼬리를 내렸다. 조선에서는 그의 경지를 넘볼 사람이 없었다. 중국 학자들도 그를 호들갑스레 높였다. 재료도 중국제의 최고급만 골라 썼다.
그런 그가 만년에 제주와 북청 유배를 거듭 다녀온 뒤 결이 조금 뉘어졌다. 북청 유배에서 풀려 돌아오다 강원도 지역을 지날 때였다. 길을 가는데 옥수수 밭에 둘린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 흘깃 보니 늙은 내외가 마루에 나와 앉아 웃으며 이야기꽃이 한창이었다.
길 가던 손이 불쑥 마당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손은 물 한 잔을 달래 마시더니 잠시 쉬어 가겠다는 듯 마루에 슬쩍 엉덩이를 걸친다.
"여보 노인! 올해 나이가 몇이우?"
"일흔입지요."
"서울은 가 보았소?"
"웬걸인겁쇼. 관청에도 못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래 이 산골에서 무얼 자시고 사우?"
"옥수수를 먹고 삽니다."
추사는 순간 마음이 아스라해졌다. 삶의 천진한 기쁨은 어디서 오는가? 한 세상을 발아래 둔 득의의 나날도 있었다. 세상이 알아주는 한다 하는 이가 반눈에도 차지 않았다. 하지만 갖은 신산(辛酸)을 다 겪고, 제주 유배지에서 아내마저 떠나보낸 뒤, 다시 북청까지 쫓겨갔다.
이제 늙고 병들어 가을 바람에 지친 발걸음을 재촉한다. 타관의 꿈자리는 늘 뒤숭숭하다. 흰 머리의 내외가 볕바라기로 앉은 툇마루의 대화, 서울 구경 한번 못하고 관청 문 앞에도 못 가봤지만, 옥수수 세 끼니로도 그들의 얼굴엔 시름의 그늘이 없었다. 아주 행복해 보였다.
그가 쓴 시는 이렇다.
"두어 칸 초가집에 대머리 버들 한 그루, 노부부의 흰 머리털 둘 다 쓸쓸하구나. 석 자도 되지 않는 시냇가 길가에서, 옥수수로 갈바람에 칠십년을 보냈네."
(禿柳一株屋數椽, 翁婆白髮兩蕭然. 未過三尺溪邊路, 玉薥西風七十年.)
시를 지은 뒤 앞서의 문답을 적고,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남북을 부평처럼 떠돌고, 비바람에 휘날렸다. 노인을 보고 노인의 말을 듣고 나니, 나도 몰래 망연자실해졌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문득 나를 돌아본다.
정민 한양대교수·고전문학
(김종원님이 주신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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